자유 바람 하늘 바람
말씀일기 110809 민4장 “보리밭” 본문
오래 간만에 오른 산책길, 집을 나설 때부터 그다지 밝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문득 들어선 보리밭 밀밭길에서 갑자기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한쪽 편 보리밭은 이미 다 패어져 허리 잘린 몸들만 남아있고, 그 옆 밀밭은 짙은 회색으로 잔뜩 영글어 목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보리도 가고 밀도 가고, 결국 나도 가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데, 나는 왜 그렇게 충격을 받고 흔들리는 것일까?
어떤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들 나를 떠나가는 것 같아 아쉽다. 다시 붙잡아 올 수 없는 이별이 아쉽다. 지속적으로 떠나 보내야만 하는 이 선교 목회 현장이 아쉽다. 벌써 많이 떠나 보냈고 앞으로도 계속 떠나 보내야만 하는 내 나이가 아쉽다. 함부로 떠날 수도 그렇다고 그냥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내가 아쉽다. 마음 속 깊은 곳의 아쉬움을 함부로 표현할 수도 없으니 더욱 아쉽다.
‘보리 친구’는 분명 열매 가득한 몸으로 잘려 어디론가 실려 갔을 텐데,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 즐거움을 주게 될 터인데, 빵빵한 ‘밀 친구’도 그렇게 될 터인데, 나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했는데, 나는 삶을 통해 그리고 죽음을 통해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내가 보리 친구의 남은 발목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고 주저 앉고 싶었던 것은 이 친구 모습에서 나중 내 모습이 아니라 지금 내 모습을 보아서였던 것은 아닐까? 황량한 들판에 허리 잘린 채 열매 없이 서 있는 내 모습 말이다.
내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걸까? 너무 욕심이 많은 모양이다. 쉽게 교훈적 결론으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각각 자신의 맡은 바 “직무대로”(33) 하나님의 일을 수행했던 레위인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다. 고핫 자손은 게르손 자손이나 므라리 자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중요한 성물을 다룬다. 하지만 그들도 그 성물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의 그 크신 영역 속에 나는 작은 일을 맡아 행할 뿐이다. 모든 이들의 직무들이 다 내 직무가 아니라, 얼마 안 되는 내 고유한 직무가 있는 것이다. 보리 친구들이 발목만 남은 채 서 있는 황량한 들판에도 참새 까마귀들이 찾아와 낟알을 주워 먹던 장면을 떠올리며, 미어지던 가슴을 다시 쓸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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