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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일기 110304 마4장 “광야에서”

유럽의 바람 2011. 3. 5. 06:55

 

말씀일기 110304  4 “광야에서”      

 

요단강의 예수님이 너무 좋은데,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1) 가셨다. 성령께서 이끌어가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능동적으로 가셨다는 의미이리라. 유혹을 찾아갔다기 보다는, 시험의 자리 즉 훈련의 자리로 가셨다는 말씀일 것이다. 요단강이 그렇게 좋아도 아니 요단강이 좋을수록, 생략하고 싶은 그 광야로 가야만 하나 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은 다양해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가 아닐까? 하나님의 아들이어든(3, 6) 고난을 피하라는 것이다. 쉽게 살라는 것, 스스로의 안일을 위해 기적을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놀라운 기적을 통해 보여주라는 것이다. 결국, 싸움의 전선은 바로 이 지점인 것 아닐까? 강한 힘과 권력과 능력을 복음의 중심에 둘 것인가, 아니면 약함과 섬김과 화해를 복음의 중심에 둘 것인가? 승리의 복음을 들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사랑의 복음을 들고 나갈 것인가?

 

거듭되는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시던 예수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는 마귀의 마지막 유혹 앞에서는 아주 단호하게 명령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10). 그 편한 길, 쉽게 사는 길의 종착역은 결국 마귀에게 경배하는 꼴이 됨을 보셨기 때문이리라. 오늘 나도 끊임없이 사이비 복음인 물량주의기복주의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할텐데

 

하지만, 만약 한번만 마귀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솔직히 그렇게라도 하고 싶지 않은가. “잠깐이잖아, 한번이잖아, 그래 그렇게 해서 더 크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잖아. ‘선교관’(사랑방)뿐만 아니라, 멋진 교회당도 짓고,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고 말이야.” 마음 속의 속삭임을 여전히 듣고 있지 않은가. “약할 때 강함 되시네찬양하면서도 은근히 그 강함에 방점을 두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더 높이, 더 빨리를 비판하면서도, “더 낮게, 더 천천히!”가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거창한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때때로 교회든 집이든 재정을 걱정 하며 조금 더 넉넉하기를 바라고, 적은 교인 수에 힘이 빠지다가 부흥시켜 주옵소서기도하며 희망을 품는 나. 그런데 이 지점에 마귀는 늘 진 치고 있는 것 같다. 마귀는 때로 나를 헛된 꿈에 부풀게 하고, 때로는 나를 심한 허탈에 빠지게도 한다. 그 양극단을 피할 길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저런 생각에 길을 못 찾고 헤맬 때도 적지 않다.

 

혹시 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신 못 차리고 또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나의 욕망이어서는 곤란하지만, 그래도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욕심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도대체 욕망과 비전의 경계는 어디일까? 목사가 이런 문제 하나도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 가지고 어떡하나? 난 왜 그렇게 숫자에 약하고, 특히 물질 문제만 나오면 정리가 잘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까? 그래도 이런 저런 생각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 배가 불러서인가? 세상에 얼마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많은데그래도 할 건 해야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락가락 맴돌다 정리 안 된 채 사라지기 일수다. 이러다가 사단에게 맥없이 잡혀 먹히는 거지.

 

성령이시여, 마귀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종을 도우소서. 광야 같은 인생에 지혜를 주소서.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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