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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시는 하나님 (헨리 나우웬) 본문
춤추시는 하나님
(Turn My Mourning into Dancing)
부제 : 인생을 통찰하는 다섯가지 지혜
1. 작은 자아에서 더 넓은 세계로
From Our Little Selves to a Lager World
치유란 마귀가 의도한 고립상태에서 내 고난을 끄집어내 내 모든 고난은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온 인류와 나아가 모든 피조물과 함께 겪는 것임을 바로 아는데서 시작한다. 나는 데이브레이크에서 "어떻게 하면 내 고통을 없앨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고통을 성장과 배움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는 마땅히 상실을 슬퍼해야 한다. 이것이 춤의 첫 스텝이다. 치유와 춤은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을 직시하는데서 시작한다. 상실과 상처를 벗어나는 길은 그 속에 들어가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난을 기껏해야 귀찮은 것이나 최악의 경우, 무의미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무조건 고통을 없애려 한다. 이 부정을 부추기는 몇 가지 유혹이 있다. 1) 끊임없이 바쁜 삶 2) 무적의 얼굴을 취하려 함 3) 인생을 단순히 생계유지 작업으로 봄 4) 쉬운 승리를 좋아함.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아주 다르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퍼레이드의 영웅이 아니라 어릿광대처럼...
가치 있는 것은 대부분 부딪쳐야 얻을 수 있다. 인내(patience)라는 말은 '고통당하다'는 뜻인 'Patior'라는 고어에서 왔다. 예수님의 삶을 보며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다. 군중들의 '호산나'가 모두 고요하게 잦아들고, 제자들과 친구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고, 그분의 입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절규가 터져 나온 뒤에서야, 바로 그 때에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사용하여 나를 빚으시고 당신과 더 가까워지게 하신다.
인생에서 중대한 질문 중 하나는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나는 그 속에서, 그것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다. 고난을 이해하는 열쇠는, 인생이 주는 불편과 아픔을 밀어내지 않는데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떠나서가 아니라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우리의 슬픔으로 들어와 우리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켜 세우며 춤을 청하신다.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다(시편30:11). 춤출 때 우리는 자신의 좁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필요없이 춤동작으로 그 자리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고 더 큰 춤의 자리로 들어간다. 온 세상이 우리의 춤판임을 알게 된다. 고뇌는 평안이 되고, 상실은 수확이 되고....빈센트 반 고흐의 생기 넘치는 멋진 꽃그림들을 보라. 그는 고달픈 인생에서 얼마나 깊은 비애와 슬픔과 우울을 맛본 사람인가! 그런데도 그의 그림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환희에 차 있는가? 생명이 충일한 해바라기 그림을 보라. 슬픔이 어디서 끝나고 춤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영광은 고통 속에 숨어 있다.
언젠가 나는 한 석수가 거대한 돌에서 여기저기 돌 조각을 크게 떼어 내며 작업하는 모습을 보았다. '돌이 무척 아프겠구나. 저 사람은 왜 돌에 저런 고통을 주는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보고 있노라니 돌 속에서 점차 우아한 댄서가 모습을 나타냈다. 댄서는 내 심안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리석은 자여, 내가 이런 고난을 받고 내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몰랐는가?' 춤의 신비는 그 동작이 슬픔 중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치유란 성령께 나를 춤으로 부르실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온갖 광고는 우리에게 슬픔 속에서는 기쁨을 맛볼 수 없다고 말한다. 감사하는 삶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이 순간까지 인도해 주신 구체적인 길로 보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2.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으로 From Holding Tight to Letting Go
그네타기 곡예에서 배우라. 상대방이 나를 잡으려면 일단 놓아야 한다. 허공에 용감히 뛰어들어야 한다. 우리는 내려 놓을 때 받는다. 위대한 역설이다. 우리는 위험한 장소에서 오히려 예기치 못한 안전을 발견한다. C.S 루이스는 [네가지 사랑]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약해진다는 것이다...마음을 절대 다치지 않으려거든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된다...천국을 제외하고 사랑의 위험에서 완전히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지옥이다." 내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움켜쥐어야 한다는 신념이야말로 인간이 고난을 겪는 커다란 원천 중 하나다. 그러나 '소유'와 '계획'과 '사람'을 내려놓으면, 비록 모험이 따를지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자유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는 또 하나의 스텝은 지금 가진 것을 움켜쥐지 않는 것이다. 안심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확보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나 다른 이의 삶을 스스로 안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따르고 싶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다 내어 드리는 것이다.
삶은 소유할 재산이나 움켜쥘 물건이라는 생각, 사람은 관리하거나 조종할 대상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일대 환상이다. 이 환상은 때로 우리를 광적인 자아실현 추구로 몰아간다. 불안한 행동주의에 빠져 '인간은 자신이 한 일의 산물'이라는 신념에 지배당한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사 속에서 자신의 낮은 자리를 확인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고통도 커질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할 때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모험에 들어선다.
예수님은 ‘넘겨졌다.’ 만물이 그 분을 통해 창조되었건만 이제 말씀이신 그분이 자신의 피조세계의 피해자가 되신다.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통제권을 잃고 무력자가 되신 것,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이다.
고난은 언제나 영적인 삶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는 때로 끔찍이 떠받들던 것들을 놓아야 한다. 이 모든 부담 때문에 어떤 이들은 ‘냉소적’이 된다. 어떤 이들은 이런 현실 때문에 집요한 ‘강박관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경제적 안정의 근거인 그물과 정서적 안정의 근거인 가족을 버리고 심령의 가장 깊은 갈망을 채워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그분을 따랐다. 그 상태가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럼에도 기꺼이 내려놓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고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온전히 변화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힘입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유란 강박관념의 반대상태다. 살짝 잡는다는 것은, 내가 획득하고 성취한 것이 내가 아니라 위에서 주신 것이 나임을 기억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스로 싸워 얻어내는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으로 옮겨갈 때 맞닥뜨리는 큰 장애물은 두려움이다. 중남미 국가들의 가난 그 이면은 곧 북미국가들의 두려움과 죄책감과 외로움이다. 미국처럼 부유한 국가들이 겪는 불안과 고독이라는 아픔은 어려운 이들을 무시한 데 대한 예기치 않은 복병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친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랑의 집에 거하시려는 의도다.
‘두려워 말라’ 이것은 복음서 전체에 울려퍼지는 말이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께 시선을 고정할 때 우리는 서서히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 이동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난다. 기도는 우리에게 대인관계가 우상이 되지 않게 하는 길을 보여준다. 기도는 세상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선물로 여기는 태도다.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시는 선물에 마음을 여는 태도다. ‘성숙’이란 따라가려는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슬픔은 우리에게 힘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를 열어준다. 바로 춤이 있는 미래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다. 질고를 아는 슬픔의 사람(사53:3)이 기쁨을 약속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너희가 곡하고 애통하리니...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0).
우리 욕심에 따라 하나님을 바꾸지 말라. 모든 소요와 긴 밤이 지난 후 우리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오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실 곳이 어디일지 기대하며 그 분을 기다릴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 임재에 대한 민감성은 물론 그분의 부재에 대한 민감성도 자란다. 하나님은 공의만도 아니고 사랑만도 아니고 자유만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신다는 것만 알아도 우리로서는 많이 아는 셈이다. 그런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험에 대한 계산은 그만하고 안전한 자리에서 뛰어내리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용납하고 사랑해야 할 인격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싶은 사람들을 자유로이 용서하시는 분이며 우리의 유한한 기대로 만든 규정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다. 당신의 삶에는 성령께서 기회를 얻어 말씀하시거나 행동하시거나 나타나실 공간이 있는가? 우리에게는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여기가 열린 마음을 가꾸어야 할 지점이다. 귀기울임에 관해 시몬 웨일은 이렇게 말한다. “귀 기울인다는 것은 내 생각을 접어두고 초연하게 마음을 비워 상대가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소중한 선물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선물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훈련이란 우리 마음에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서커스단 리더가 내게 말했다 “내가 허공에 뛰어올라 거꾸로 공중제비하는 것을 보며 다들 나를 영웅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영웅은 잡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팔을 내밀고 믿는 것뿐입니다. 잡는 사람이 나를 끌어올려 주리라고 믿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작은 삶을 둘러싸고 계시며 우리를 잡아 주고 붙들어 주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기쁨은 물론 슬픔까지도 꽉 움켜쥔 채 살아가는 우리의 손은 바로 그런 이유로 안심하고 느슨해 질 수 있다. 다시 한번 우리도 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춤추는 법을 배울 수 있다.
3. 운명론에서 희망으로
From Fatalism to Hope
4. 감정의 조종에서 순전한 사랑으로
From Manipulation to Love
5. 두려운 죽음에서 환희의 삶으로
From a Fearful Death to a Joyous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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