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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일기 120317 고전14장 ‘욕망과 소망의 기로’ 본문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8-19). 아무렴 맞는 말이지 하면서도, 즉 ‘그러나’ 뒤의 19절 말씀이 강조 구절임을 잘 알면서도 18절 말씀을 그냥 흘려 보내지 못하는 나.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보다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4)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권면도, 바울처럼 방언을 할 줄 알면서 그런 말을 해야 힘도 실리고 폼도 날 텐데 하는 생각에, 또 바울이 부럽다.
이 부러움 조차도 또 욕심일까? 계속 부러워하면서 언젠가 부어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며 살아야 하나, 아님 방언의 은사는 아직도 내게 주시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주시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하나? 교우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보다 더 위대한 방언은 없다고 설교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 보다 더 놀라운 방언은 없다고 가르치면서도, 흔히 말하는 턱이 툭 떨어지고 혀가 풀려 소리 나는 그 ‘방언’이 여전히 부럽다고 한다면 분명 욕심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의지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무아지경’의 기도를 하고 싶은 거룩한 소망일 수도 있지 않나?
방언을 구하는 기도, 이거 내가 나이 먹어 가면서 내려 놓아야 할 것 중에 하나일까? 나이는 먹어가도 어린 아이처럼 구해야 할 기도제목일까? 오늘 따라 바울의 강조점을 오히려 거슬러 자꾸 방언을 부러워하고 있는 나, 방언에 대해서 단순 명백하지 못하고 오늘 따라 그 이중성 속에 갈등하고 혼돈스러운 나. 계속해서 천칭에 달아본다. ‘인간적 욕망’과 ‘순전한 소망’ 중 그 어느 쪽이 무게가 더 나가는지… 후, 이렇게 말하고 나면 이제 더 이상은 정말 말도 꺼내 보기 힘들 텐데, 답답함이 다 가시지 않으면서도, 저울은 기어이 ‘욕망’ 쪽으로 기우는 듯 하다. 물론 퍼센트 수량으로만 보면 ‘순전한 소망’이 크겠지만, 무아지경 속에 기도 드리고 싶은 거룩한 소망에 단 몇 퍼센트라도 사람에게 폼 나게 보이고 싶어서라는 생각이 섞인다면 그건 욕망이겠지.
주님을 향한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를 난 언제쯤이나 순수한 마음으로 간구하게 될까? 주님! 깊든 얕든, 길든 짧든 순전한 기도를 당신께 드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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