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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일기 140401 렘37장 ‘왜 그랬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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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일기 140401 렘37장 ‘왜 그랬을까?’

유럽의 바람 2014. 4. 7. 09:25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을 자신의 삶의 진실과 맞닥뜨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기본 원칙이겠지만, 때론, 절망적 상황 속에 있는 이에게 거짓된 희망이라도 주어야 할 때도 있다. 임시방편이긴 하겠지만, 그렇게라도 그가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다면, 꼭 나쁜 것은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희망이 간혹 기적적으로 현실화되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끝까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다'는 예언을 굽히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그가 성격상 애초에 꽉 막힌 사람이어서? 젊은 시절 온통 비판의식만 배우고 익힌 붉은 사람이어서? 아닐 것이다. 그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을 것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시드기야 왕이 자신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또한 조용히 왕궁으로 불러다가 나라의 앞날을 묻는데, 예레미야인들 왜 왕에게 낙관적 전망을 해 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는 왜 그렇게 끝까지 냉정한 태도를 보였을까? 그것은 우선, 하나님과 그 누구보다 깊은 관계 속에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확신 없는 일에 목숨 걸 수는 없는 법이니까. 꼭 그렇게 절대 비타협 노선을 걸어간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개인도 때로는 철저히 깨지고 부서져야 하는 순간이 있고,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그걸 너무 막아서는 것도 곤란할 수 있다. 하물며, 큰 집단, 한 나라의 미래와 관련되어서는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거짓 희망만 선포하는 것은 실제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도움이 안 되고, 그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불의한 권력의 시녀 역할만 하게 되는 것이리라.

 

예수님도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고 선포하다가는 권력 투쟁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살아남기가 어렵고, 살아 남는다 해도, 고생고생하며 살게 되나 보다. 그래도 주님은 주님의 길을, 예레미야도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갔다. 그러고 보면, 나의 가는 길은 비교할 수 없이 순탄한 길 아닌가! 그래도 돌아보면 참 힘겨웠던 시간들도 많았는데, 그 중 많은 경우는 억울하게 어려움 당한 시간이기 보다는 내 욕심 내 자아를 내려놓지 못해서 겪었던 고통의 시간이었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한편, 오늘도 내게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옳으냐 그르냐, 냉정한 선포보다도, 한 사람을 그저 받아주고 달래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한 사람을 진정 위로해주고 희망을 안겨 주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것도 내 삶의 엄연한 현실이다. 주여, 고독 속에서도, 주님이 가신 길, 예레미야가 살아간 길, 내 시야에서 놓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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