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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일기 130125 욥9장 ‘키리에 엘레이손’ 본문
참된 신학은 삶에서 나온다. 책상 머리를 떠나지 못하는 신학은 ‘쉰 학’이 된다. 바울의 신학이 든든한 것도 그가 선교 현장, 즉 삶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현장성 역사성 때문이다.
빌닷을 향한 욥의 답변이 참 신학이 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하나님을 향한 지독한 항변이라 해도, 고난이라고 하는 삶의 자리에서의 정직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말할 수 있는 인생은 결코 없다(2).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그 손길을 가늠할 수도, 그 의도를 다 이해할 수도 없다(4-14). 설사 인간이 의롭다 해도, 그 의로움을 강변할 수 없고, 오직 그 분의 은총을 빌 수 밖에 없다(15): 키리에 엘레이손!
그렇다고, 우리가 욥에게서 무조건 붙들고 가야 하는 기계적 교리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괴로운 몸짓과 솔직한 고백까지 읽을 수 있을 때 참된 신학을 배운다.
그는 자신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힘’이시고 ‘정의’이시고 ‘비밀’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답답해 하고,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음에 한숨 짓는다(33).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의 판단과 주권에 달려 있으니 자신이 수고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항변한다(29). 사실, 살면서 이 점으로 인해 고민해 보지 않은 신앙인이 있을까?
욥기는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에는 인간에게 다른 아무 방법도 없다고 말하는 그 최고의 신학-정말 이 은혜의 교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조차도 고상한 선포가 아니라, 가슴 아프고 답답한 고난의 현장에서의 하소연으로부터 온 것임을...... 키리에 엘레이손!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처절한 절규를 보지 못하고, 죽음을 가볍게 여기며 곧 부활하기 위해 몸을 풀고 있는, 이상한 껍데기 하나님만 붙들고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벌이는 전지 전능자의 한 바탕 쇼처럼 되어 버리면, 인간이 되시기까지 인간의 극한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눈물, 하나님의 고난은 사라지고...그렇게 주님의 사랑은 박제가 되고 만다.
욥기 묵상을 통해 주님의 자비와 은총의 그 무게와 깊이와 넓이를 조금 더 진하게 느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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