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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절을 보내며
손교훈 목사
대강절을 ‘대강’ 보낼 일이 아니다. 대강절은 새 교회력의 시작을 알린다. 대강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이다. 그러나 대강절은 단지 성탄절을 기다린다는 이상의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의 그 엄청난 사랑을 생각하는 때이며, 주님은 무엇을 위해 오셨고 장차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묵상하고 결단하는 기간이다.
IMF라고 다들 울상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성탄은 호텔에서부터 온다. 그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에서부터 온다. 또한 우리의 성탄은 백화점으로부터 온다.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던 산타클로스가 요란한 바겐세일의 썰매를 끌고 온다.
실상 우리 주님은 어떻게 오셨는가? 예수님이 오실 당시도 요즘 이상으로 화려하고 요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주님은 저 들 밖의 한 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에게 오셨다. 역사의 한밤중에, 꼭 IMF와 같은 시기에 우리에게 오셨고, 들판에서 양 틈에 자던 목자들 ,즉 실직하고 거리를 헤매는 우리의 아버지들에게 오셨고, ‘짤리지’ 않으려고 고통분담의 최전선에서 조출, 철야 지친 몸을 가눌 길 없어 조각 잠에 의지하는 우리의 산업전사 누이들에게 삼촌들에게 오셨다.
주님은 또한 먼 나라 동방의 박사들-지혜자들에게 소리 없는 별빛으로 오셨다.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연인”이 되자고,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애3:26)다고 하시며, 우리와 굳이 멍에를 함께 하시겠다고 오셨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오순도순 함께 별을 세는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자고 오셨다. 어두운 세상 탓하지 말고 내 영혼 불태워 역사의 어둠을 몰아내는 한 줄기 빛으로 살자고 오셨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말구유에 작은 미소로 누워 있는 어린 아기로 오셨다. 허영과 위세의 껍데기는 다 벗어버리고 에덴으로 돌아가자고, 총칼의 위협에도 해맑은 웃음으로 바라보는 어린 아이처럼 살자고 오셨다. 목마름과 굶주림 속에서도 5병2어 기적의 단초를 열었던 어린 아이의 헌신으로 살자고 오셨다.
우리는 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전 들밖의 목동들에게 오신 주님을 보지 못하던 무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먼 나라의 동방박사도 보았던 주님을 보지 못하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었다. 주님의 탄생 소식을 접히고도 오히려 그 사실을 거부하고 은폐하려던 교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혹시 바람 부는 들밖에 있지 아니하고 따뜻한 안방에 있게 해주심을 감사하는 우리가 주님을 못 뵙는 것이 아닐까? 들밖에 있지 아니하고 큰 교회 교인으로 한국 기독교의 든든한 성 안에 있는 우리가 주님을 못 뵙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왔던 우리가 정작 다시 오실 주님을 몰라보는 것이 아닐까? 우리 마음의 열쇠를 점검할 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기다리나?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결국은 오지 않는 막연한 ‘고도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미 찾아오셨고 여전히 함께 하시는 그 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기다리나? 터무니 없는 확률의 복권 당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기다리는 것이다. 왜 기다리나? 이 땅에 주님의 평화가 필요하고, 사랑과 정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다려도 잘 기다려야지 잘못 기다리면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어서옵셔~ 안녕히 가세요~” 가볍게 보내드리는 술집이나 디스코텍의 기도(문지기)가 될 뿐이다. 심지어는 음란과 행악의 주인, 강도와 같이 된다. 왕같은 제사장인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노라 하면서도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같이” “길에서 살인하”고 “사악을 행”(호6:9)할 수도 있고, “길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렘3:2)히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끝없는 욕심의 배를 채워 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막힌 담을 헐고, 갇힌 영혼 해방시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준비하는 사람이다. 장차 올 좋은 날 좋은 때, 봄볕 따스한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 이 땅에서 견뎌내야 할 겨울이 있음을 알고 역사의 겨울, 인생의 겨울을 준비한다. 동물들은 겨울 날 먹이를 저장해 두고, 인간들도 김장을 담그며 겨울을 준비하지만 사실 준비는 쌓아두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겨울을 나기 위한 나무들의 노력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무성하던 잎사귀들을 다 떨어 버리고 날렵하고 가벼운 몸매로 단장한다.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을 다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서는 것 그것이 생존의 원리이자 기다림의 핵심이다. 어떻게든 끼워 입으려고만 하고, 움켜쥐고 있으려고만 하고 훌훌 털어버리지 아니하면 우리 인생의 봄은 영원히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롬8:25).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은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마침내 다시 오시고야 말 그 님을 확신 가운데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은 보지 못하지만 끝내는 그 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되리라는 소망으로 산다. 모진 풍랑 뒤에는 반드시 고요한 평화가 뒤따라 올 것을 믿으며.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빌3:13-14) 얻기 위해 한 발 한 발 믿음의 산을 오르는 것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약3:4)되어 그 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다. 흰 눈이 요란한 온 세상을 소복히 덮어주듯이 너의 허물을 잊어주고 덮어 준다. 기다리는 사람은 판단하고 비방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하나님 앞에 놓여 있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시시비비를 가리시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 죄 때문에 오셨고 마침내 죄악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시려고 오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귀중한 그 무엇보다도 날마다 용서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산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5-6).
그 어느 때 보다도 우리 주님이 간절히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위기의 시대를 기회의 때로 삼아야 할 때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밖에 있었던 참 일꾼 목자들에게 오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이다. 먼 동방의 지혜자들에게 별빛으로 오신 주님의 침묵 속의 말씀을 들을 때이다. 헛간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의 미소 속에 담긴 말씀을 들을 때이다. 교만을 내 던지고 주님 앞에 알몸으로 서서 우리 자신 참회의 움직이는 말씀으로 설 때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 옴을 알고 참고 견디어냄으로 소망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설 때다. 서로 안아 주고 덮어주는 살아있는 사랑의 사람들로 우뚝 서야 할 때다.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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