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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일기 140214 요일 3장 '사랑의 단초'

유럽의 바람 2014. 2. 15. 20:42

말씀일기 140214  3 '사랑의 단초'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쉽사리 범죄할 수 없다. 거듭난 자라면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어 그렇고(9),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면 또한 그럴 것이고(6), 훗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만날 소망이 있다면, 더욱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 할 것이다(3).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얼핏 소극적인 자세로 느껴질 수 있지만,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와 동거하며, 또한 그가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사는 자는 결코 허투루 인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더욱 강력한 존재론적 책임의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쉽게 저 세상으로 물러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은혜를 쉽게 나만의 구원 차원으로 전락시키지도 않는다. 접근 방식에서 조금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은 바울의 생각과도 통한다.

 

바울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했던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주장도 그저 책상 위에서 나온 원론적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또 다른 형제들인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차별 받는 부당함 속에서, 복음의 심각한 변질과 왜곡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소한 것 아닌가?

 

그처럼, 요한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맡은 자로서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고 가져야만 하는, 자연스런 책임의식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결국 '형제들의 서로 사랑'이라고 권면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믿음의 강조를 통해 형제 사랑에 접근했다면, 요한은 믿는 자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형제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공동체는 이 '형제 사랑'으로 똘똘 뭉친 혁명적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표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다고 하고, 심지어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까지 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려야 한다고 하니, 이보다 더 급진적인 사랑 공동체가 있을까? 게다가,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믿음의 형제들간의 서로 사랑이니, 그 사랑은 매우 구체적이고 치열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교회 공동체를 섬길 자로 어울리나 싶어 몸에 힘이 빠진다. 우리 선교교회가 이런 공동체를 꿈꿀 수는 있는 건가 눈을 감아 보지만, 쉬이 눈 떠지지 않는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는 요한 사도의 권면에 맘 무거운데, 가벼운 말과 혀로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니(야고보서의 지적), 그냥 바닥에 납작 엎어질 뿐이다.

 

여기서 인간의 기본적인 한계 등을 운운하며 쉽사리 '은혜' 타령으로 도망가면 안 된다. 바로 이 극간의 현실, 거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시작해야 한다. 길이 있을까? 답답한 나에게, 주님은 한 단어를 안겨 주신다. "진실함" 그래, '진실함'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주여, 내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내게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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