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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일기 120504 삼상22장 '생명의 소중함' 본문
사울을 피해 이리 저리 다니던 다윗은 어느 새 재야 인사가 되어 버렸다. 동병상련이랄까? 가난하고 상처받은 약한 자들이 그에게로 몰려 들었다(2). 한 동안 아둘람 굴에 머물던 다윗은 선지자 갓의 조언에 따라, 유다 땅을 향해 떠난다(5).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 행동했지만, 결국 사울 권력의 본고장 기브아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분노와 두려움에 휘말려 이성을 잃은 사울왕은 없는 말까지 만들어 내며(13), 다윗에게 빵과 칼을 주어 도왔던 아히멜렉 제사장을 비롯하여 세마포 에봇 입은 자만 팔십 오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사울의 신하들은 이 일을 대부분 꺼림칙하게 여겼지만, 에돔 사람 도엑은 나서서 과잉 충성을 하였다.
제사장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을 접하며, 내가 자주 가져왔던 소시민적 생각이 오늘도 뇌리를 파고 든다. 이러한 집단 학살은 불의한 권력의 부도덕성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영웅 한 사람의 탄생을 위한 집단 피흘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역사 속의 영웅들은 언제나 수 많은 죄 없는 백성들의 피흘림을 기반으로 등장한다. 모세의 출생 이야기 속에도, 심지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배후에도 수 많은 아이들의 죽음이 뒤따른다.
권력의 위협 앞에서도 정직하게 소신껏 자기 발언을 하고 죽음을 맞이한 아히멜렉을 향해 ‘당신은 정말 순결하고도 숭고한 죽음을 죽었노라. 순교했노라’고 치켜 세우며 가슴 뜨거워하기에는 오히려 내 가슴이 콱 막힌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영웅은 없어도 좋으니 한 사람이라도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 불의한 권력 앞에 살자고 아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 권력의 칼에 허무하게 날라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
예수님도 그러셨겠지.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셨겠지. 딜레마. 그 어느 누군들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겠는가?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른 예수님,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깨닫게 된 기저에는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다’라는 소망과 확신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래도, 사람은 그의 삶으로써보다도 죽음으로써 더 크게 말한다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다. 나의 생명이 소중한 것처럼, 너의 생명 그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다. 아히멜렉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사탄이 주는 생각일까? 아닐 것이다. 죽음은 분명 끝이 아니지만, 결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이 땅의 한 생명의 소중함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세상 권력의 폭력보다도 더 큰 폭력이 돼버리고 말 것이다.
죽음 앞에 선 자들, 그리고 이미 죽어간 자들과 남은 자들 앞에서 난 결코 가벼이 그 죽음을 미화할 수 없다. 한 생명이라도 허투루 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예수님이 기어이 죽으셔야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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