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바람 하늘 바람
소리의 진정한 친구 김벌레 본문
차원이 다른 소리, 차원이 다른 인생,
뭐라 딱히 제목 붙일 수 없는 인생.... 그래서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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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3일 (목) 10:52 노컷뉴스
“콜라 병따는 소리, 콘돔으로 만들었죠"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 자동차 문 닫는 소리, 뽀드득 이 닦는 소리...세상엔 참 많은 소리가 있는데요. 하지만 쓸모없는 소리란 없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키 158에 몸무게 43킬로그램자그마한 체구에 온갖 소리를 만져온 사람이 있습니다. 김벌래. 고졸 출신인 그는 ‘음향의 달인’ ‘광고 소리의 대부’로 통합니다. 콜라 회사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았고, 86아시안 게임, 88올림픽, 2002월드컵, 대전 엑스포. 굵직한 행사들의 사운드 연출을 도맡으면서 우리의 소리를 세계에 알렸다.
모든 소리를 모으고 재창조해온 그의 ‘소리인생’은 흡사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입니다. ‘신나게 일하는 것이 힘이라’는 사운드 디자이너 김벌래의 인생이야기를 9월 1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사운드의 예술가, 만든 소리만 2만 여 편
▶ 드라마 ‘눈의 여왕’에서 미남 탤런트 현빈 씨의 스승으로 출연하셨어요. 드라마 출연도 여러 번 하셨죠?
제가 모양새가 특이해서 꼭 이상한 역만 맡아요.(웃음) 그래서 여러 번 해 봤습니다.
▶ 음향의 달인이다, 광고소리의 대부라는 소리를 듣는데 지금까지 만든 소리가 2만 여 편이라고요?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도 잘 기억은 못합니다. 다만 돈 받은 거, 소위 말해서 금전출납부에 적힌 것을 보니까 거의 그 정도 되더라고요. 그래서 2만 여 편이라는 숫자가 나온 겁니다.
◇ 소리의 원음, 아이디어로만 받은 백지수표
▶ 김벌래 선생님하면 모 콜라 광고 이야기가 거의 전설입니다. 그때 광고의 어떤 소리를 해 달라고 하던가요?
어떤 소리를 해 달라고 특정한 부탁이 온 게 아니고 메모에 ‘마시면 상쾌하고, 마시면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보라는 내용이 있는 거예요. 그걸 소리화시키라고 하니까 황당하죠. 그 당시에 웨이터들이 맥주병 따는 소리가 무척 기분이 좋았어요. 무교동에 대형 맥주집이 많았는데 거기서 제일 잘 따는 친구가 있는 곳을 가서 영업시간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친구를 불러서 한 번 스튜디오에서 신나게 따 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그 오밤중에 방송국에 갔더니 경비 아저씨들이 웬일이냐고 해서 맥주병 따는 소리를 녹음하러 왔다고 그랬죠. 50여 병을 다 따봤는데 원하는 소리가 없어서 그럼 소주병은 어떨까 해서 소주병도 따봤어요. 나중에 다 끝나고 나서 새벽에 들어보니까 병마개 따는 소리가 아니더라고요.
우리가 듣는 가청 주파수하고 녹음하고는 달라요. 오프너도 쇠고 병마개 뚜껑도 쇠니까 뚜껑이 열릴 때 반쯤 휩니다. 그 휘는 소리가 기분 나쁜 거예요. 너무 높은 음이어서 우리 귀에는 안 들리는 거죠. 녹음한 것이 실패에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고무풍선을 터트려 보자고 해서 바늘로도 찔러보고 담뱃불로도 터트려봤는데 당시의 고무풍선의 재질이 아주 열악했어요. 더 재질이 질긴 게 없을까 찾다가 약방에 가서 콘돔을 샀죠. “아저씨, 콘돔 좀 주세요.” “몇 개나?” “30개요.” “쪼그만 놈이 왜 그렇게 많이 써?”(웃음) 약사가 생각할 때는 여관에 일하는 사람인 줄 알았겠죠. 그건 재질이 질기고 좋아요. 소리가 벌써 탄력이 있더라고요. 다 터트려보니까 비슷해요.
그렇다면 또 약방을 뒤질 수는 없으니까 그때는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표어가 있을 때에요. 가족협회가 영등포구청 뒤에 있었는데 거길 쫓아갔어요. 이만저만해서 그러니 좀 주십시오, 했더니 그때는 무료로 나눠줄 때라 한 박스 100개짜리를 주더라고요. 그걸 두 겹, 세 겹으로 겹쳐서 바람을 넣어봤어요. 그러니까 소리의 음폭이 다 달라져요. 바람 넣기에 따라서도 다 다르고. 번호를 매겨서 그런 식으로 다 터트렸어요. 거기서 브랜드 네임과 가장 닮은 기분 좋은 소리, 그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를 찾으려고 애를 쓴 거죠. 그런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브랜드 네임이 두 음절인데 왜 두 음절로 할 생각을 못했지? 그걸 해서 붙이면 혼자 있을 때보다 꾸밈새라고 해서 훨씬 예뻐져요. 하나는 마개를 꽉 잡고 있다가 “쉭-쉭-” 이렇게 하고 또 하나는 “쉬이익-” 지금처럼 컴퓨터가 있을 때가 아니니까 전부 가위로 잘라서 했어요. 1초도 안 되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요.몇 백 번을 고쳐봤어요.
0.01m 빠르게도 붙여보고 느리게도 붙여보고. 그렇게 해서 거의 브랜드 네임에 가깝게 찾아낸 거예요. 그걸 동경특파원에게 이야기를 해서 영화를 찍어서 같이 더빙을 해서 보냈어요. 극동지부의 지사를 동경에서 관리할 때니까요. 보냈는데 한 달이 되도 연락이 없어요. 이거, 미역국 먹었구나. 포기하는 거죠. 그런데 한 달이 지나니까 연락이 왔어요. 동경에 계신 분이 한국에 갈 거다, 그러니 사인을 해라 그러더라고요.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사인을 하는데 테이프를 하나 줘요. 제가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물어봤더니 할리우드에서 FX작업을 했대요. 신디사이저나 컴퓨터 작업을 그 당시에 그쪽에서는 하고 있었던 거죠. 거기서 재창조를 하느라고 한 달이 지난 건데 원음이 합격을 했던 거예요. 나중에 하숙집에 돌아와서 들어보니까 정말 멋있게 되어있더라고요. 내가 한 건 완전히 거지에요. 이건 소리도 아닌 거예요. 원음 아이디어만 줬어요.
▶ 원음 아이디어만 준 건데 백지수표를 받으신 거예요?
집에 가서 열어보니까 수표에 아무 것도 안 써 있잖아요. 외국인들도 실수를 하는구나.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 이튿날 출근해서 통역하는 친구한테 이거 액수가 없다고, 가짜라고 했더니 그 친구도 이상하다고 호텔에 전화를 걸어서 액수가 없다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전화를 끊더니 당신 마음대로 쓰는 거라고, 백지수표라는 거예요. 자기도 처음 봤대요. 그때부터 가슴이 떨리고 두근거리더라고요.
▶ 당신 마음대로 쓰라고 했을 때 처음 생각하신 액수는 얼마였어요?
그런 생각도 안 했어요. 그때 저희 봉급이 3만 원대였으니까 수표를 주머니에 넣고 덜덜덜 떨었어요. 이것만 넣고 다녀도 배가 불러요. 하도 폈다 접었다 해서 해어질 정도였죠. 이어령 교수님이 미국에 초빙교수로 갔을 때 외국대학교에서 백지수표를 준 적이 있어요. 제가 이어령 교수님 밑에서 일을 배울 때 백지수표 때문에 혼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교수님한테 가서 저도 백지수표를 받았다고 했더니 그게 서양인들이 잘 쓰는 수법이래요. 동양인들의 점잖은 거, 의젓한 거를 역이용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어령 교수님도 호텔비, 차비, 밥값을 곧이곧대로 쓰신 거예요. 나는 교수니까 곧이곧대로 밥값, 차비, 이렇게 했지만 이건 상업성 아니냐, 무한의 가치가 있고 네가 만든 건 아이디어 값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멋있게 옷을 입고 나온 건 요새 말로 하면 그 사람들한테도 인접 저작권이 있어요. FX를 써서 거기까지 만들어 내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저는 두 음절의 아이디어 값만 적으려니까 많이는 못 적겠더라고요. 그때 제가 살던 곳이 동산리라고 구파발 넘어서 경기도에 살 때거든요. 제 소원이 돈 벌어서 구파발에 와서 사는 게 소원이었어요. 불광동의 문화촌에 있는 60평짜리 집 하나가 100만원이에요. 여기에서 살면 정말로 행복하겠다, 매번 늦게 끝나면 차가 끊어져서 30리 길을 걸어가야 하니까 힘들잖아요. 그래서 집 한 채 값을 적었어요.
그나마도 100, 이렇게 적으면 우스울 것 같아서 98만 5천원인가를 적었어요. 그래서 가끔 사람이 살다 보면 돈에 쪼들리기도 하잖아요. 우리 큰 애가 “아버지, 눈 딱 감고 동그라미 하나만 더 그렸어도 지금 인생이 확 달라졌을 텐데!” 집이 열 채가 되는 거잖아요.(웃음)
◇ ‘벌래’는 잘 기어 다닌다고 해서 얻은 애칭
▶ 원래는 연극을 하셨었죠?
18살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극단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연극이 하고 싶었어요. 배우를 하면 참 재미있겠다 싶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연극이 명동의 ‘시공간’과 을지로입구의 ‘원각사’ 두 군데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극장 시공간 옆 담벼락에 배우모집 광고가 붙었더라고요. 3기 연구생 배우모집을 보고는 까까머리 고2 학생인 나를 찾는구나 생각하고 극단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광고를 찢었어요. 다른 사람이 보고 오면 안 되니까 찢어서 뒷주머니에 넣었어요. 연습실에 들어갔더니 어르신들이 연극연습을 하고 있어요. “너 뭐야?” “써 붙인 거 보고 왔는데요. 배우 3기 연구생 모집한다고 해서 들어왔어요.” “네가 배우를 하겠다고?” 막 웃어요. “넌 자격미달이야. 고졸 이상이야. 집에 가!” 그러고서 이튿날 또 갔어요. 어르신들 눈에 익히려고 다음 날도 가고 그 다음 날도 또 가고, 한 10일은 드나들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담배 사와라, 껌 사와라 그러면서 시작했어요.
▶ 본명은 김평호인데 김벌래라는 이름은 누가 지은 건가요?
고3이 되어서도 무대 뒤에서 계속 심부름을 하면서 1년이 넘어가니까 조금 익숙해졌잖아요. 그랬더니 무대 소품 갖다 놓는 일을 시키더라고요. 당시에는 무대가 많이 바뀌어야 관객들이 좋아했어요. 초가집 나왔다가 2막에는 별안간 기와집이 나오고, 그런 게 신나는 건데 그러려면 소도구도 많고 소품도 많잖아요. 그걸 깜깜한데 기어 다니면서 다 갖다 놓는 거죠.돌아가신 이해랑 선생님이 벌러지만한 놈이 잘 기어 다닌다고 해서 연습실에 가면 “야, 벌러지야. 담배 하나 사와.” “예!” 벌러지라는 이름이 장난하기도 재미있고 별명으로 부르신 거예요.
▶ 배우의 꿈은 이루셨어요?
못했죠.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끝났어요. 제가 국립체신고등학교를 나왔어요. 당시는 6.25가 끝나고 어려운 시대였잖아요. 그러니까 기술자를 만들어내는 학교에요. 교통학교, 체신학교, 사범학교, 이렇게 세군데인데 우연히 체신학교를 들어갔는데 의무적으로 3년 복무를 해 줘야 해요. 고등학교 때 월급 받고 기숙사에서 밥 공짜로 먹고 공부한 대신에 3년을 체신부에서 근무를 해야 해요. 지금의 정보통신부죠.제가 뭘 배웠느냐 하면 전보치는 기술을 배웠어요. 중앙전신전화국이라고 광화문에 있는 텔렉스 두 가지를 배웠는데 발령받은 곳이 서대문이었어요.
공무원인데 최하급으로 의무적으로 했어요. 그런데 낮에는 공무원 하다가 밤에는 연극하는데 기웃거리는데 마침 MBC도 생기고 TBC, 동아방송 등 민방 라디오 시대가 열렸어요. 신문에 동아방송 성우 1기생 모집을 보고 저걸 하면 되겠구나 했어요. 이해랑 선생님이 농담으로 너희 집은 거울도 없냐고 하셨어요. 꼬락서니를 봐라 이거죠. 성우를 하면 얼굴을 안 보여주니까 좋겠구나, 꼬락서니하고는 관계가 없으니까요.
◇ 효과맨 시절, 탤런트 이순재 씨가 죽을 뻔한 사연
▶ 성우시험을 보셨어요?
일단은 공무원이잖아요. 다른 길로 가려니까 소위 철밥통을 부셔? 이런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성우시험을 보는데 맨 끝 번호에요. 고민하다가 맨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갔더니 맨 끝 번입니다, 그러더라고요. 서류심사를 하는데 당시에는 다 연극하던 분들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감히 그걸 할 생각도 안 하는데 연극하시는 분들이 시험 보러 온 거죠.사미자, 전원주, 김을동, 박정자, 이 분들은 합격되신 분들인데 물경 3천 명이 왔대요. 서류심사에서 6백 명을 추려서 실기시험을 보는 거예요. 드라마센터에서 시험을 보는데 셰익스피어 대본을 나눠줘요.
종이가 뚫어져라 칠해 가면서 악센트 줘가면서 연습하는 거죠.기적이 일어났어요. 심재훈 선생님이 우리 사부님인데 몇 번부터 몇 번까지는 이쪽 줄로 가고, 이런 안내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아직 개국할 당시가 아니었는데 점심 먹고 쉬었다가 오후 시간에 만났어요. “벌러지, 웬일이야?” “성우시험 보려고요.” “성우? 너 찾으려고 난리가 났어!”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고 전화기도 없잖아요. 방송국에서 개국 준비를 하는데 쓸만한 놈이 하나 있는데 어디에 박혀있는지 보이지가 않는다는 거죠. “성우 하지 마. 내일부터 제작부에 출근 해.” 효과맨으로 바로 취직이 됐어요.
▶ 배우에서 효과맨을 하게 되셨는데 그때 어떠셨어요?
그 전에 연극할 때 심재훈 선생님 밑에서 신협이나 신필름에서 일을 도와드렸어요. 연극하면서 효과 일을 도와드렸는데 싹수가 있는 놈이니까 찾으신 거예요. 내일부터 나오라고 하시니 대본 외우던 거 쓰레기통에 확 버리고 “몇 번부터 몇 번까지 이리로 서!” 심재훈 선생님이 하시던 안내를 제가 대신 했어요. “아니, 쟤는 아까까지도 같이 연습하던 놈이 어떻게 된 거야?” “어허! 그렇게 됐어.”(웃음)
▶ 지금은 효과음들이 다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때는 수동으로 손으로 했잖아요.
교육도 시키고 해야 하니까 개국하기 1년 전에 모집을 한 거예요. 당시에 저는 심재훈 선생님과 함께 소리 만드는 기계 만들고 소도구 만들고 문짝 만들고 여러 가지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재미있는 소리 나는 기계들을 많이 만들었어요.예를 들어 총소리 같은 경우 지금은 컴퓨터로 다 되는데 그때는 정말로 화약을 터트렸어요. 망치로 때리는데 잘못 때리면 소리가 잘 안 나서 NG가 나요. 그래서 화약에 못을 하나 박아놓고 전기 통하는 봉을 하나 붙여서 합선을 시키면 쾅 하는 효과음이 백발백중이죠. 기관총도 돼요. 못 죽 박아놓고 화약들 심어놓고 훑으면 두두두두 소리가 나요. 화약 양에 따라서 소리도 달라지고 재미난 것들도 발명하곤 했어요. 그것이 연극판에서도 쓰인 거죠. 옛날에는 연극에서 총 가지고 하면 망치로 때렸거든요. 그런데 잘 못 때리면 텍! 소리만 난다고요. 하지만 이건 전기로 하니까 갖다 대기만 하면 제대로 된 효과음이 나죠.
▶ 그 외에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참 많을 것 같아요.
녹음할 때인데 당시에는 열악하잖아요. 지금은 마이크가 여러 개지만 그때는 DX7 이라고 이한만 게 하나 달려있었어요. 하나 놓고 한 쪽에서는 성우가 하고 또 한 쪽에서는 효과맨이 물 먹으면 물 먹는 소리 내야 하고 손바닥 치면 손바닥 치는 소리 내야 하고 그랬어요. 삼국지를 녹음할 때였는데 칼싸움이 많잖아요. 지금은 흑선 가지고도 하는데 미련하게 식칼을 가지고 했어요. 아마 손잡이가 있으니까 잡기 좋아서 그랬을 거예요. 신나게 촹! 촹! 이러고 다른 한 쪽에서 성우들은 “받아라! 얍!” 이걸 하는데 이순재 선생님이 하실 때 칼자루가 쑥 빠져버렸어요. 촹! 촹! 하다가 저쪽 벽에 콱 꽂히는 거예요. 이순재 선생님을 살짝 지나갔어요. 만약에 얼굴에 맞았으면 국회의원도 못 해보고 ‘거침없이 하이킥’도 못하고 그 명연기를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녹음이 중단된 적이 있어요.
◇ 일상생활에서 찾은 비범함은 바로 역발상!
▶ 민방시대가 되면서 CM이라는 게 나갔어요. 그게 광고 쪽 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신 건가요?
흑백 TV가 등장을 하니까 라디오가 한계점이 왔잖아요. 동아방송의 특별수사본부 같은 A급 프로그램은 남겨놓고 시시한 프로그램들은 다 없애버렸어요. TV상황에 맞추다 보니까요. 거기서 드라마 PD를 하다가 그만둔 이강우 PD가 효과를 이용해서 라디오 CM을 만들면 어떨까 제안하시더라고요.당시에는 성우분들에게 광고문 하나 읽어달라고 하면 내가 약장사냐고 하면서 안 읽어줘요. 지금이야 CF 나가려고 난리지만. 효과를 넣어서 광고문안을 만들어 가려는 거였죠. 초창기에는 스폰서인 광고주가 오면 무료로 해 줬어요. 그리고 시간 개념 없이 22초든 25초든 하는 대로 해서 우리 광고의 스폰서를 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우니까 공짜로 만들어줬다고요.
▶ 금성 TV리모콘이나 훼스탈 광고가 유명해요.
금성 TV에서 리모콘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을 합니다. 초창기에는 마우스처럼 라인이 있었어요. 줄이 길게 달려있어서 리모콘을 누르면 채널이 바뀌었어요. 그게 얼마 안 가서 무선으로 바뀌는 거죠. 소비자가 봤을 때는 편집을 그렇게 한 줄 아는 거예요. 축구하는 거 나왔다가 리모콘을 누르면 별안간 다른 게 나오니까요. 빨리 개념이 안 온단 말이죠.그래서 감독한테 파란 줄 좀 나가게 해 보라고,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서 누르면 파란 광선이 나가는 걸로. 파란 광선이 TV에 부딪치면 화면이 바뀌는 걸로 보이는 소리를 만들어 보자고 해서 보이는 그림이 나가면서 ‘픽’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금성사 대리점에서 난리가 났어요. 소비자가 리모콘을 사 갔을 거 아니에요. 내 거 고장 났나 보다고, 파란 광선도 없고, 픽하는 소리도 안 난다고.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요. 초창기 때 곤욕을 치렀어요. 그런데 그 ‘픽’소리가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면 유엔성냥이라고 팔각으로 되어 있는 게 있어요. 성냥개비 3,4개를 확 그은 소리에요.
▶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세요?
일상생활에서 얻는 거죠.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까 매일 그런 생각만 하고 살아요.
▶ 지금 생각하면 별 거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대단한 발견이잖아요.
그럼요. 공전의 히트를 친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요절한 친구인 최응찬 씨하고 같이 하숙을 했어요. 그 친구가 재미있는 역을 많이 했어요. 콜롬보도 하고. 당시에 콜롬보가 굉장히 유명했는데 광고문안 하나 읽어달라고 하면 안 했습니다. 같이 하숙하는 친구니까 “어이, 친구. 이거 한 번 읽어봐. 라디오 광고 한 번 읽어주면 담배 값을 준대.” 라디오는 1초만 소리가 안 나도 고장 난 거 같거든요.
이번에는 소리 안 나는 광고를 한 번 만들어보자는 발상이 떠오른 거예요. 제품이 들어왔는데 깡통에 자갈을 집어넣고 “이 소리도 아닙니다.” 또 모래를 집어넣고 “이 소리도 아닙니다.” 그 다음이 라디오에요. 그런데 소리가 안 나요. “바로 이 소리입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미세한 분말이라 소리가 안 납니다.” 광고주가 기가 막힌 광고라고 하더라고요.그걸 최운찬 씨가 코맹맹이 소리로 읽었는데 일약 대 스타가 되었어요. 지금까지도 그 제품이 다른 걸 해도 먹히지가 않는다고 해요.
◇ 백 점짜리 소리는 없어, 제품과 타이밍이 맞을 뿐
▶ 광고에서 소리, 이 사운드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겠네요.
컴퓨터라는 기계가 나오면서 컴퓨터에서 소리가 안 나오면 큰일 납니다. 끌 때도 딩딩딩~ 소리가 나야 하고 켤 때도 마찬가지에요. 또 게임할 때 소리 안 나오면 안 되죠. 그렇게 소리가 위대해지기 시작한 겁니다. 아까도 잠깐 풍선이야기를 했지만 치약광고 할 때 얼마나 이를 잘 닦았으면 예쁜 여자가 혀로 이를 훑으면 “뽀드득” 소리가 납니까. 이 소리가 죽어도 안 나는 소리에요. 혀로 그 소리를 낼 수는 없거든요. 그것도 또 풍선에 물 묻혀서 손으로 훑으면 돼요. 그때는 럭키치약만 있을 때인데 다른 치약이 거기에 도전한 거죠. 그런데 소리가 너무 재미있으니까 소리만 잔뜩 넣은 거예요. 15초, 20초 광고에 좋은 소리는 한 번만 써야 합니다. 너무 소리가 신나서 3,4번을 쓰니까 제품명을 하나도 기억 못하고 ‘뽀드득’만 기억하는 거예요. 소리는 좋은데 제품명을 모르면 실패하는 거죠.
▶ 그럼 실패하신 적도 있으세요?
소리에 100점이라는 건 없습니다. 잘해봤자 60점 정도, 그거 비슷해 그러지, 아주 좋다는 건 없어요. 소리에는 잣대가 없다는 거죠. 제품과 타이밍이 딱 맞았을 때는 금상첨화가 되는 그런 경우에요. 또 재미있는 게 다른 곳에 시집을 가서 출세하는 경우가 있어요. 80년대 초 부산에 신발회사가 있었는데 수출 난으로 망해갈 때에요. 꽤 이름 있는 신발인데 맨 마지막에 주먹을 탁 치는 그림이 나와요. 그때 신발이 탁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때가 가게 문, 공장 문이 닫힐 때니까 광고주가 셔터문 떨어지는 소리 같다는 거예요. 문 닫는 소리 같다는 거죠. 징크스죠. 이걸 빼라는 거예요. 이 좋은 소리가 소박을 맞았어요.
그렇게 소박맞고 놀고 있는데 팬티회사인 백양과 태창이 난리가 난 적이 있어요. 그 소리를 한 번 써 먹자고 했어요. 배우 이덕화 씨가 어떤 여자 집을 찾아가잖아요. 그런데 뭔 사연인지 여자가 문을 닫잖아요. 그러면 남자는 화가 났는지 문을 탁 치는데 그때 트라이~탕! 나오거든요. 신발에서 혼나고 나온 놈이 그리로 시집가서 공전의 히트를 쳤어요.
▶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함석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라고 하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는데 저희 집이 잘 살았어요. 웬만하면 초가집이라 소리가 안 나요. 그런데 우리 집은 생철집이에요. 부잣집이었죠. 비만 오면 온 동네 아이들이 그 소리를 들으려고 몰려들어요. 초가집에서는 못 듣거든요. ‘자자자자자’ 하는 소리가 좋았어요.어렸을 때 들었던 소리가 지금도 안 잊혀지고 마음이 포근해지고 그래서 그 소리가 좋은 거죠. 이렇게 제가 겪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후배들에게 들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책을 한 번 써봤어요. 제목이 <제목을 못 정한 책>이에요. 콜라 이야기도 해야 하고 주먹 치는 소리도 해야 하고 소리 안 나는 소리도 해 봤고, 이러니 제목을 뭐라고 딱히 할 수가 없더라고요. 할 얘기가 너무 많아요. 사실 제목을 정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결국은 원고가 다 끝나도록 못 정했어요. 이것도 저것도 다 제목감이죠.
◇ 2차원적인 소리, 상상력을 심어줘야 해
▶ 김벌래 선생님을 능가하는 효과맨이라든지 라이벌은 없으셨어요?
소리를 만드는 사람은 참 많은데 제 소리가 2차원적이에요. 상상하는 소리들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선두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보이는 소리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어요. 방송국의 사운드맨들 참 많습니다. 다 보이는 소리만 하거든요. 그런데 광고를 했을 때는 2차원적인 것을 만들어 줘야 해요. 상상력을 주고 이미지를 소비자한테 심어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래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심재훈 선생님이 기술적인 것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셨지만 특히 저한테 영향을 주셨던 분은 김종삼 선생님이라고 시인이시거든요. 도깨비 김종삼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이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동안 잘 했다는 칭찬 한 마디를 안 해 주셨어요.
아주 철저하게 보헤미안 기질이 있고 가정은 빵점이고 오로지 술, 그리고 시만 아셨는데 천만다행으로 드라마 음악 브릿지를 하셨어요. 이 분이 클래식을 듣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신데 꼭 2차원적인 음악을 하세요. 그런데 청취자는 이 소리를 듣고 상상을 하거든요. 거기서 광고나 소리들을 2차원적으로 하는 것을 도깨비 선생님한테서 배웠어요. 남들이 안 했을 때 저도 그랬어요. 1차원적인 소리에서 벗어나서 2차원적인 것을 했을 때 광고에서의 이미지가 오래가더라는 것을 알고 시작하게 된 거예요.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박길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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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58에 몸무게 43킬로그램자그마한 체구에 온갖 소리를 만져온 사람이 있습니다. 김벌래. 고졸 출신인 그는 ‘음향의 달인’ ‘광고 소리의 대부’로 통합니다. 콜라 회사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았고, 86아시안 게임, 88올림픽, 2002월드컵, 대전 엑스포. 굵직한 행사들의 사운드 연출을 도맡으면서 우리의 소리를 세계에 알렸다.
모든 소리를 모으고 재창조해온 그의 ‘소리인생’은 흡사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입니다. ‘신나게 일하는 것이 힘이라’는 사운드 디자이너 김벌래의 인생이야기를 9월 1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사운드의 예술가, 만든 소리만 2만 여 편
▶ 드라마 ‘눈의 여왕’에서 미남 탤런트 현빈 씨의 스승으로 출연하셨어요. 드라마 출연도 여러 번 하셨죠?
제가 모양새가 특이해서 꼭 이상한 역만 맡아요.(웃음) 그래서 여러 번 해 봤습니다.
▶ 음향의 달인이다, 광고소리의 대부라는 소리를 듣는데 지금까지 만든 소리가 2만 여 편이라고요?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도 잘 기억은 못합니다. 다만 돈 받은 거, 소위 말해서 금전출납부에 적힌 것을 보니까 거의 그 정도 되더라고요. 그래서 2만 여 편이라는 숫자가 나온 겁니다.
◇ 소리의 원음, 아이디어로만 받은 백지수표
▶ 김벌래 선생님하면 모 콜라 광고 이야기가 거의 전설입니다. 그때 광고의 어떤 소리를 해 달라고 하던가요?
어떤 소리를 해 달라고 특정한 부탁이 온 게 아니고 메모에 ‘마시면 상쾌하고, 마시면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보라는 내용이 있는 거예요. 그걸 소리화시키라고 하니까 황당하죠. 그 당시에 웨이터들이 맥주병 따는 소리가 무척 기분이 좋았어요. 무교동에 대형 맥주집이 많았는데 거기서 제일 잘 따는 친구가 있는 곳을 가서 영업시간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친구를 불러서 한 번 스튜디오에서 신나게 따 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그 오밤중에 방송국에 갔더니 경비 아저씨들이 웬일이냐고 해서 맥주병 따는 소리를 녹음하러 왔다고 그랬죠. 50여 병을 다 따봤는데 원하는 소리가 없어서 그럼 소주병은 어떨까 해서 소주병도 따봤어요. 나중에 다 끝나고 나서 새벽에 들어보니까 병마개 따는 소리가 아니더라고요.
우리가 듣는 가청 주파수하고 녹음하고는 달라요. 오프너도 쇠고 병마개 뚜껑도 쇠니까 뚜껑이 열릴 때 반쯤 휩니다. 그 휘는 소리가 기분 나쁜 거예요. 너무 높은 음이어서 우리 귀에는 안 들리는 거죠. 녹음한 것이 실패에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고무풍선을 터트려 보자고 해서 바늘로도 찔러보고 담뱃불로도 터트려봤는데 당시의 고무풍선의 재질이 아주 열악했어요. 더 재질이 질긴 게 없을까 찾다가 약방에 가서 콘돔을 샀죠. “아저씨, 콘돔 좀 주세요.” “몇 개나?” “30개요.” “쪼그만 놈이 왜 그렇게 많이 써?”(웃음) 약사가 생각할 때는 여관에 일하는 사람인 줄 알았겠죠. 그건 재질이 질기고 좋아요. 소리가 벌써 탄력이 있더라고요. 다 터트려보니까 비슷해요.
그렇다면 또 약방을 뒤질 수는 없으니까 그때는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표어가 있을 때에요. 가족협회가 영등포구청 뒤에 있었는데 거길 쫓아갔어요. 이만저만해서 그러니 좀 주십시오, 했더니 그때는 무료로 나눠줄 때라 한 박스 100개짜리를 주더라고요. 그걸 두 겹, 세 겹으로 겹쳐서 바람을 넣어봤어요. 그러니까 소리의 음폭이 다 달라져요. 바람 넣기에 따라서도 다 다르고. 번호를 매겨서 그런 식으로 다 터트렸어요. 거기서 브랜드 네임과 가장 닮은 기분 좋은 소리, 그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를 찾으려고 애를 쓴 거죠. 그런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브랜드 네임이 두 음절인데 왜 두 음절로 할 생각을 못했지? 그걸 해서 붙이면 혼자 있을 때보다 꾸밈새라고 해서 훨씬 예뻐져요. 하나는 마개를 꽉 잡고 있다가 “쉭-쉭-” 이렇게 하고 또 하나는 “쉬이익-” 지금처럼 컴퓨터가 있을 때가 아니니까 전부 가위로 잘라서 했어요. 1초도 안 되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요.몇 백 번을 고쳐봤어요.
0.01m 빠르게도 붙여보고 느리게도 붙여보고. 그렇게 해서 거의 브랜드 네임에 가깝게 찾아낸 거예요. 그걸 동경특파원에게 이야기를 해서 영화를 찍어서 같이 더빙을 해서 보냈어요. 극동지부의 지사를 동경에서 관리할 때니까요. 보냈는데 한 달이 되도 연락이 없어요. 이거, 미역국 먹었구나. 포기하는 거죠. 그런데 한 달이 지나니까 연락이 왔어요. 동경에 계신 분이 한국에 갈 거다, 그러니 사인을 해라 그러더라고요.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사인을 하는데 테이프를 하나 줘요. 제가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물어봤더니 할리우드에서 FX작업을 했대요. 신디사이저나 컴퓨터 작업을 그 당시에 그쪽에서는 하고 있었던 거죠. 거기서 재창조를 하느라고 한 달이 지난 건데 원음이 합격을 했던 거예요. 나중에 하숙집에 돌아와서 들어보니까 정말 멋있게 되어있더라고요. 내가 한 건 완전히 거지에요. 이건 소리도 아닌 거예요. 원음 아이디어만 줬어요.
▶ 원음 아이디어만 준 건데 백지수표를 받으신 거예요?
집에 가서 열어보니까 수표에 아무 것도 안 써 있잖아요. 외국인들도 실수를 하는구나.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 이튿날 출근해서 통역하는 친구한테 이거 액수가 없다고, 가짜라고 했더니 그 친구도 이상하다고 호텔에 전화를 걸어서 액수가 없다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전화를 끊더니 당신 마음대로 쓰는 거라고, 백지수표라는 거예요. 자기도 처음 봤대요. 그때부터 가슴이 떨리고 두근거리더라고요.
▶ 당신 마음대로 쓰라고 했을 때 처음 생각하신 액수는 얼마였어요?
그런 생각도 안 했어요. 그때 저희 봉급이 3만 원대였으니까 수표를 주머니에 넣고 덜덜덜 떨었어요. 이것만 넣고 다녀도 배가 불러요. 하도 폈다 접었다 해서 해어질 정도였죠. 이어령 교수님이 미국에 초빙교수로 갔을 때 외국대학교에서 백지수표를 준 적이 있어요. 제가 이어령 교수님 밑에서 일을 배울 때 백지수표 때문에 혼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교수님한테 가서 저도 백지수표를 받았다고 했더니 그게 서양인들이 잘 쓰는 수법이래요. 동양인들의 점잖은 거, 의젓한 거를 역이용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어령 교수님도 호텔비, 차비, 밥값을 곧이곧대로 쓰신 거예요. 나는 교수니까 곧이곧대로 밥값, 차비, 이렇게 했지만 이건 상업성 아니냐, 무한의 가치가 있고 네가 만든 건 아이디어 값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멋있게 옷을 입고 나온 건 요새 말로 하면 그 사람들한테도 인접 저작권이 있어요. FX를 써서 거기까지 만들어 내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저는 두 음절의 아이디어 값만 적으려니까 많이는 못 적겠더라고요. 그때 제가 살던 곳이 동산리라고 구파발 넘어서 경기도에 살 때거든요. 제 소원이 돈 벌어서 구파발에 와서 사는 게 소원이었어요. 불광동의 문화촌에 있는 60평짜리 집 하나가 100만원이에요. 여기에서 살면 정말로 행복하겠다, 매번 늦게 끝나면 차가 끊어져서 30리 길을 걸어가야 하니까 힘들잖아요. 그래서 집 한 채 값을 적었어요.
그나마도 100, 이렇게 적으면 우스울 것 같아서 98만 5천원인가를 적었어요. 그래서 가끔 사람이 살다 보면 돈에 쪼들리기도 하잖아요. 우리 큰 애가 “아버지, 눈 딱 감고 동그라미 하나만 더 그렸어도 지금 인생이 확 달라졌을 텐데!” 집이 열 채가 되는 거잖아요.(웃음)
◇ ‘벌래’는 잘 기어 다닌다고 해서 얻은 애칭
▶ 원래는 연극을 하셨었죠?
18살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극단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연극이 하고 싶었어요. 배우를 하면 참 재미있겠다 싶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연극이 명동의 ‘시공간’과 을지로입구의 ‘원각사’ 두 군데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극장 시공간 옆 담벼락에 배우모집 광고가 붙었더라고요. 3기 연구생 배우모집을 보고는 까까머리 고2 학생인 나를 찾는구나 생각하고 극단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광고를 찢었어요. 다른 사람이 보고 오면 안 되니까 찢어서 뒷주머니에 넣었어요. 연습실에 들어갔더니 어르신들이 연극연습을 하고 있어요. “너 뭐야?” “써 붙인 거 보고 왔는데요. 배우 3기 연구생 모집한다고 해서 들어왔어요.” “네가 배우를 하겠다고?” 막 웃어요. “넌 자격미달이야. 고졸 이상이야. 집에 가!” 그러고서 이튿날 또 갔어요. 어르신들 눈에 익히려고 다음 날도 가고 그 다음 날도 또 가고, 한 10일은 드나들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담배 사와라, 껌 사와라 그러면서 시작했어요.
▶ 본명은 김평호인데 김벌래라는 이름은 누가 지은 건가요?
고3이 되어서도 무대 뒤에서 계속 심부름을 하면서 1년이 넘어가니까 조금 익숙해졌잖아요. 그랬더니 무대 소품 갖다 놓는 일을 시키더라고요. 당시에는 무대가 많이 바뀌어야 관객들이 좋아했어요. 초가집 나왔다가 2막에는 별안간 기와집이 나오고, 그런 게 신나는 건데 그러려면 소도구도 많고 소품도 많잖아요. 그걸 깜깜한데 기어 다니면서 다 갖다 놓는 거죠.돌아가신 이해랑 선생님이 벌러지만한 놈이 잘 기어 다닌다고 해서 연습실에 가면 “야, 벌러지야. 담배 하나 사와.” “예!” 벌러지라는 이름이 장난하기도 재미있고 별명으로 부르신 거예요.
▶ 배우의 꿈은 이루셨어요?
못했죠.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끝났어요. 제가 국립체신고등학교를 나왔어요. 당시는 6.25가 끝나고 어려운 시대였잖아요. 그러니까 기술자를 만들어내는 학교에요. 교통학교, 체신학교, 사범학교, 이렇게 세군데인데 우연히 체신학교를 들어갔는데 의무적으로 3년 복무를 해 줘야 해요. 고등학교 때 월급 받고 기숙사에서 밥 공짜로 먹고 공부한 대신에 3년을 체신부에서 근무를 해야 해요. 지금의 정보통신부죠.제가 뭘 배웠느냐 하면 전보치는 기술을 배웠어요. 중앙전신전화국이라고 광화문에 있는 텔렉스 두 가지를 배웠는데 발령받은 곳이 서대문이었어요.
공무원인데 최하급으로 의무적으로 했어요. 그런데 낮에는 공무원 하다가 밤에는 연극하는데 기웃거리는데 마침 MBC도 생기고 TBC, 동아방송 등 민방 라디오 시대가 열렸어요. 신문에 동아방송 성우 1기생 모집을 보고 저걸 하면 되겠구나 했어요. 이해랑 선생님이 농담으로 너희 집은 거울도 없냐고 하셨어요. 꼬락서니를 봐라 이거죠. 성우를 하면 얼굴을 안 보여주니까 좋겠구나, 꼬락서니하고는 관계가 없으니까요.
◇ 효과맨 시절, 탤런트 이순재 씨가 죽을 뻔한 사연
▶ 성우시험을 보셨어요?
일단은 공무원이잖아요. 다른 길로 가려니까 소위 철밥통을 부셔? 이런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성우시험을 보는데 맨 끝 번호에요. 고민하다가 맨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갔더니 맨 끝 번입니다, 그러더라고요. 서류심사를 하는데 당시에는 다 연극하던 분들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감히 그걸 할 생각도 안 하는데 연극하시는 분들이 시험 보러 온 거죠.사미자, 전원주, 김을동, 박정자, 이 분들은 합격되신 분들인데 물경 3천 명이 왔대요. 서류심사에서 6백 명을 추려서 실기시험을 보는 거예요. 드라마센터에서 시험을 보는데 셰익스피어 대본을 나눠줘요.
종이가 뚫어져라 칠해 가면서 악센트 줘가면서 연습하는 거죠.기적이 일어났어요. 심재훈 선생님이 우리 사부님인데 몇 번부터 몇 번까지는 이쪽 줄로 가고, 이런 안내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아직 개국할 당시가 아니었는데 점심 먹고 쉬었다가 오후 시간에 만났어요. “벌러지, 웬일이야?” “성우시험 보려고요.” “성우? 너 찾으려고 난리가 났어!”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고 전화기도 없잖아요. 방송국에서 개국 준비를 하는데 쓸만한 놈이 하나 있는데 어디에 박혀있는지 보이지가 않는다는 거죠. “성우 하지 마. 내일부터 제작부에 출근 해.” 효과맨으로 바로 취직이 됐어요.
▶ 배우에서 효과맨을 하게 되셨는데 그때 어떠셨어요?
그 전에 연극할 때 심재훈 선생님 밑에서 신협이나 신필름에서 일을 도와드렸어요. 연극하면서 효과 일을 도와드렸는데 싹수가 있는 놈이니까 찾으신 거예요. 내일부터 나오라고 하시니 대본 외우던 거 쓰레기통에 확 버리고 “몇 번부터 몇 번까지 이리로 서!” 심재훈 선생님이 하시던 안내를 제가 대신 했어요. “아니, 쟤는 아까까지도 같이 연습하던 놈이 어떻게 된 거야?” “어허! 그렇게 됐어.”(웃음)
▶ 지금은 효과음들이 다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때는 수동으로 손으로 했잖아요.
교육도 시키고 해야 하니까 개국하기 1년 전에 모집을 한 거예요. 당시에 저는 심재훈 선생님과 함께 소리 만드는 기계 만들고 소도구 만들고 문짝 만들고 여러 가지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재미있는 소리 나는 기계들을 많이 만들었어요.예를 들어 총소리 같은 경우 지금은 컴퓨터로 다 되는데 그때는 정말로 화약을 터트렸어요. 망치로 때리는데 잘못 때리면 소리가 잘 안 나서 NG가 나요. 그래서 화약에 못을 하나 박아놓고 전기 통하는 봉을 하나 붙여서 합선을 시키면 쾅 하는 효과음이 백발백중이죠. 기관총도 돼요. 못 죽 박아놓고 화약들 심어놓고 훑으면 두두두두 소리가 나요. 화약 양에 따라서 소리도 달라지고 재미난 것들도 발명하곤 했어요. 그것이 연극판에서도 쓰인 거죠. 옛날에는 연극에서 총 가지고 하면 망치로 때렸거든요. 그런데 잘 못 때리면 텍! 소리만 난다고요. 하지만 이건 전기로 하니까 갖다 대기만 하면 제대로 된 효과음이 나죠.
▶ 그 외에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참 많을 것 같아요.
녹음할 때인데 당시에는 열악하잖아요. 지금은 마이크가 여러 개지만 그때는 DX7 이라고 이한만 게 하나 달려있었어요. 하나 놓고 한 쪽에서는 성우가 하고 또 한 쪽에서는 효과맨이 물 먹으면 물 먹는 소리 내야 하고 손바닥 치면 손바닥 치는 소리 내야 하고 그랬어요. 삼국지를 녹음할 때였는데 칼싸움이 많잖아요. 지금은 흑선 가지고도 하는데 미련하게 식칼을 가지고 했어요. 아마 손잡이가 있으니까 잡기 좋아서 그랬을 거예요. 신나게 촹! 촹! 이러고 다른 한 쪽에서 성우들은 “받아라! 얍!” 이걸 하는데 이순재 선생님이 하실 때 칼자루가 쑥 빠져버렸어요. 촹! 촹! 하다가 저쪽 벽에 콱 꽂히는 거예요. 이순재 선생님을 살짝 지나갔어요. 만약에 얼굴에 맞았으면 국회의원도 못 해보고 ‘거침없이 하이킥’도 못하고 그 명연기를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녹음이 중단된 적이 있어요.
◇ 일상생활에서 찾은 비범함은 바로 역발상!
▶ 민방시대가 되면서 CM이라는 게 나갔어요. 그게 광고 쪽 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신 건가요?
흑백 TV가 등장을 하니까 라디오가 한계점이 왔잖아요. 동아방송의 특별수사본부 같은 A급 프로그램은 남겨놓고 시시한 프로그램들은 다 없애버렸어요. TV상황에 맞추다 보니까요. 거기서 드라마 PD를 하다가 그만둔 이강우 PD가 효과를 이용해서 라디오 CM을 만들면 어떨까 제안하시더라고요.당시에는 성우분들에게 광고문 하나 읽어달라고 하면 내가 약장사냐고 하면서 안 읽어줘요. 지금이야 CF 나가려고 난리지만. 효과를 넣어서 광고문안을 만들어 가려는 거였죠. 초창기에는 스폰서인 광고주가 오면 무료로 해 줬어요. 그리고 시간 개념 없이 22초든 25초든 하는 대로 해서 우리 광고의 스폰서를 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우니까 공짜로 만들어줬다고요.
▶ 금성 TV리모콘이나 훼스탈 광고가 유명해요.
금성 TV에서 리모콘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을 합니다. 초창기에는 마우스처럼 라인이 있었어요. 줄이 길게 달려있어서 리모콘을 누르면 채널이 바뀌었어요. 그게 얼마 안 가서 무선으로 바뀌는 거죠. 소비자가 봤을 때는 편집을 그렇게 한 줄 아는 거예요. 축구하는 거 나왔다가 리모콘을 누르면 별안간 다른 게 나오니까요. 빨리 개념이 안 온단 말이죠.그래서 감독한테 파란 줄 좀 나가게 해 보라고,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서 누르면 파란 광선이 나가는 걸로. 파란 광선이 TV에 부딪치면 화면이 바뀌는 걸로 보이는 소리를 만들어 보자고 해서 보이는 그림이 나가면서 ‘픽’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금성사 대리점에서 난리가 났어요. 소비자가 리모콘을 사 갔을 거 아니에요. 내 거 고장 났나 보다고, 파란 광선도 없고, 픽하는 소리도 안 난다고.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요. 초창기 때 곤욕을 치렀어요. 그런데 그 ‘픽’소리가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면 유엔성냥이라고 팔각으로 되어 있는 게 있어요. 성냥개비 3,4개를 확 그은 소리에요.
▶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세요?
일상생활에서 얻는 거죠.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까 매일 그런 생각만 하고 살아요.
▶ 지금 생각하면 별 거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대단한 발견이잖아요.
그럼요. 공전의 히트를 친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요절한 친구인 최응찬 씨하고 같이 하숙을 했어요. 그 친구가 재미있는 역을 많이 했어요. 콜롬보도 하고. 당시에 콜롬보가 굉장히 유명했는데 광고문안 하나 읽어달라고 하면 안 했습니다. 같이 하숙하는 친구니까 “어이, 친구. 이거 한 번 읽어봐. 라디오 광고 한 번 읽어주면 담배 값을 준대.” 라디오는 1초만 소리가 안 나도 고장 난 거 같거든요.
이번에는 소리 안 나는 광고를 한 번 만들어보자는 발상이 떠오른 거예요. 제품이 들어왔는데 깡통에 자갈을 집어넣고 “이 소리도 아닙니다.” 또 모래를 집어넣고 “이 소리도 아닙니다.” 그 다음이 라디오에요. 그런데 소리가 안 나요. “바로 이 소리입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미세한 분말이라 소리가 안 납니다.” 광고주가 기가 막힌 광고라고 하더라고요.그걸 최운찬 씨가 코맹맹이 소리로 읽었는데 일약 대 스타가 되었어요. 지금까지도 그 제품이 다른 걸 해도 먹히지가 않는다고 해요.
◇ 백 점짜리 소리는 없어, 제품과 타이밍이 맞을 뿐
▶ 광고에서 소리, 이 사운드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겠네요.
컴퓨터라는 기계가 나오면서 컴퓨터에서 소리가 안 나오면 큰일 납니다. 끌 때도 딩딩딩~ 소리가 나야 하고 켤 때도 마찬가지에요. 또 게임할 때 소리 안 나오면 안 되죠. 그렇게 소리가 위대해지기 시작한 겁니다. 아까도 잠깐 풍선이야기를 했지만 치약광고 할 때 얼마나 이를 잘 닦았으면 예쁜 여자가 혀로 이를 훑으면 “뽀드득” 소리가 납니까. 이 소리가 죽어도 안 나는 소리에요. 혀로 그 소리를 낼 수는 없거든요. 그것도 또 풍선에 물 묻혀서 손으로 훑으면 돼요. 그때는 럭키치약만 있을 때인데 다른 치약이 거기에 도전한 거죠. 그런데 소리가 너무 재미있으니까 소리만 잔뜩 넣은 거예요. 15초, 20초 광고에 좋은 소리는 한 번만 써야 합니다. 너무 소리가 신나서 3,4번을 쓰니까 제품명을 하나도 기억 못하고 ‘뽀드득’만 기억하는 거예요. 소리는 좋은데 제품명을 모르면 실패하는 거죠.
▶ 그럼 실패하신 적도 있으세요?
소리에 100점이라는 건 없습니다. 잘해봤자 60점 정도, 그거 비슷해 그러지, 아주 좋다는 건 없어요. 소리에는 잣대가 없다는 거죠. 제품과 타이밍이 딱 맞았을 때는 금상첨화가 되는 그런 경우에요. 또 재미있는 게 다른 곳에 시집을 가서 출세하는 경우가 있어요. 80년대 초 부산에 신발회사가 있었는데 수출 난으로 망해갈 때에요. 꽤 이름 있는 신발인데 맨 마지막에 주먹을 탁 치는 그림이 나와요. 그때 신발이 탁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때가 가게 문, 공장 문이 닫힐 때니까 광고주가 셔터문 떨어지는 소리 같다는 거예요. 문 닫는 소리 같다는 거죠. 징크스죠. 이걸 빼라는 거예요. 이 좋은 소리가 소박을 맞았어요.
그렇게 소박맞고 놀고 있는데 팬티회사인 백양과 태창이 난리가 난 적이 있어요. 그 소리를 한 번 써 먹자고 했어요. 배우 이덕화 씨가 어떤 여자 집을 찾아가잖아요. 그런데 뭔 사연인지 여자가 문을 닫잖아요. 그러면 남자는 화가 났는지 문을 탁 치는데 그때 트라이~탕! 나오거든요. 신발에서 혼나고 나온 놈이 그리로 시집가서 공전의 히트를 쳤어요.
▶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함석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라고 하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는데 저희 집이 잘 살았어요. 웬만하면 초가집이라 소리가 안 나요. 그런데 우리 집은 생철집이에요. 부잣집이었죠. 비만 오면 온 동네 아이들이 그 소리를 들으려고 몰려들어요. 초가집에서는 못 듣거든요. ‘자자자자자’ 하는 소리가 좋았어요.어렸을 때 들었던 소리가 지금도 안 잊혀지고 마음이 포근해지고 그래서 그 소리가 좋은 거죠. 이렇게 제가 겪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후배들에게 들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책을 한 번 써봤어요. 제목이 <제목을 못 정한 책>이에요. 콜라 이야기도 해야 하고 주먹 치는 소리도 해야 하고 소리 안 나는 소리도 해 봤고, 이러니 제목을 뭐라고 딱히 할 수가 없더라고요. 할 얘기가 너무 많아요. 사실 제목을 정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결국은 원고가 다 끝나도록 못 정했어요. 이것도 저것도 다 제목감이죠.
◇ 2차원적인 소리, 상상력을 심어줘야 해
▶ 김벌래 선생님을 능가하는 효과맨이라든지 라이벌은 없으셨어요?
소리를 만드는 사람은 참 많은데 제 소리가 2차원적이에요. 상상하는 소리들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선두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보이는 소리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어요. 방송국의 사운드맨들 참 많습니다. 다 보이는 소리만 하거든요. 그런데 광고를 했을 때는 2차원적인 것을 만들어 줘야 해요. 상상력을 주고 이미지를 소비자한테 심어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래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심재훈 선생님이 기술적인 것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셨지만 특히 저한테 영향을 주셨던 분은 김종삼 선생님이라고 시인이시거든요. 도깨비 김종삼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이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동안 잘 했다는 칭찬 한 마디를 안 해 주셨어요.
아주 철저하게 보헤미안 기질이 있고 가정은 빵점이고 오로지 술, 그리고 시만 아셨는데 천만다행으로 드라마 음악 브릿지를 하셨어요. 이 분이 클래식을 듣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신데 꼭 2차원적인 음악을 하세요. 그런데 청취자는 이 소리를 듣고 상상을 하거든요. 거기서 광고나 소리들을 2차원적으로 하는 것을 도깨비 선생님한테서 배웠어요. 남들이 안 했을 때 저도 그랬어요. 1차원적인 소리에서 벗어나서 2차원적인 것을 했을 때 광고에서의 이미지가 오래가더라는 것을 알고 시작하게 된 거예요.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박길자 작가)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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