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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 여기에도 필요할 것 같네요 본문
북한 방문기
2005년 5월 2일(월)
우여곡절 끝에, KLM 비행기 편으로 북한 방문 길에 오르니 오전 11시 50분 경이다. 짐은 무게가 오버였지만 다행히 큰 탈 없이 통과했다. 비행기 안에서 혹시 빠진 게 없었나 점검해 보는데, 자동차를 바꿔 타고 오게 되면서 제일 중요한 성경-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의 초청으로 가는데도 강범식 집사님은 나에게 성경을 가져가면 안 된다고 조언했었고, 그 때 나는 ‘내가 볼 성경조차도 가져갈 수 없다면, 난 가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지 않았던가-을 빠뜨렸음을 알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글쎄, 어쩌면 더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연맹에 부탁해서, 북한 성경과 찬송을 얻어서 7박 8일을 지내야겠다.
함부르크를 출발, 강 범식 집사님과 함께 암스텔담 공항에 내리니, 비가 부슬 부슬 내린다. 마치 이 여행길을 암시라도 하듯... 암스텔담 공항은 크기가 대단하다. 한참을 걸어 베이징 갈 비행기 탈 곳 F3에 도착하니, 라인마인 한인교회 이 한나 집사님(이화선 목사님 딸)이 먼저 와 기다리고 계신다. 이 집사님은 짐 Kg 오버 때문에 비행기를 놓칠 뻔할 정도로 단단히 애를 잡수신 모양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나누어 주려고 하는 집사님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강 집사님과 이 집사님, 두 분은 여러 가지 이야기로 방북 준비 및 미래를 준비하신다.
북측 판문각 방문과 주북한 독일 대사와의 만남, 그리고 아마도 주일날 봉수교회에서의 예배 계획 외에는 분명한 계획을 모르는 채, 우리는 ‘봐야 한다. 만나야 한다. 사랑 나눠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그저 가는 것이다.
1996년도에 중국을 방문하며,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연변 등지를 돌면서 기도드렸던 것이 이제 10년째 드디어 반쪽의 또 하나의 조국, 북한 땅을 내 발로 밟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보며, 온 몸에 전율을 느낀다.
느즈막히 장 승익 목사님이 도착하셨고, 목사님과 나는 시원한 음료 한 잔 하며, 여행길 호흡을 맞추었다. 비행기는 17:20 이륙 예정이었으나 1시간 이상 연발되어 결국 18:47에야 이륙했다. 서편 햇살을 받으며, 나는 창가에 앉아 있다. 8시간 30분 후면 우리는 베이징에 도착할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내 결혼식 때 친우들이 축가로 불러준 “반도의 십자가 어깨에 지고” 가사가 완벽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한참을 골몰해서 마침내 다 떠오르긴 했지만...
여호와께서 나를 사도로 삼으사 가난한 자에게 가슴 벅찬 소식 전하고,
마음 상한 자 고침을, 포로된 자 자유를, 옥에 갇힌 자 놓임을,
슬픈 형제 위로를! 주여 나 여기 있나이다. 보내소서.
고난의 땅, 삼천리. 반도의 십자가 어깨에 지고 해방의 그 날까지.
결혼 축하연 때 아내와 함께 불렀던 노래 가사도 슬며시 떠오른다.
우리들 만난 곳, 뜨거운 갈망의 땅. 너무도 긴 세월, 목마름에 지냈던 날 들.
동천 해 처럼, 혹은 들풀처럼 우리들의 사랑 어둠 속에 피어난 꽃.
아직도 진정한 평화는 없지만 내일의 승리를 확신하며 마주잡은 손.
길가의 풀처럼, 혹은 이슬처럼 우리들의 사랑, 어둠 속에 피어난 꽃.
하여 모진 비바람 속에도 새로 열리는 땅에, 마침내
새벽을 피우는 민주의 꽃이여, 마침내 새벽을 깨우는 통일의 꽃이여.
기내 음식 과자 봉지 안에서 조그만 꼬리표 하나가 나오는데, 거기 이렇게 써 있다. Eine aufregende Zeit beggint in naher Zukunft! 뒷면에 영어로 A very adventurous time is waiting for you! 그렇다. 나를 두고 격려해 주는 문구라 생각된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은 간섭하고 인도하고 계신다. 감사하다고 즐겁다고만 말하기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그렇다. 모험이다. 탐험이다.
2005년 5월 3(화)
몇 시간이라도 자 두었어야 하는데, 눈감고 앉은 자세로 씨름만 하다가 북경의 아침을 맞이했다. 간단한 아침 기내식, 그러나 다 먹지도 못했다. 아픈 것은 아니지만 무척 피곤하다는 느낌이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데 말이다.
11시경 드디어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야말로 ‘남남북녀’라 했던가? 11시30분 이륙. 시차 1시간으로 인해 1시간 30분쯤 비행하여 오후 2시경 평양에 내리게 될 것이다. 기내 스피커에서는 정확히 가사를 알 수는 없지만, 느낌은 분명한 북조선 특유의 노래들이 계속 들려 나온다. ‘노동신문’도 읽어보았다. 역시 비슷하다.
드디어 평양행 비행기 이륙. 그러나 소음이 너무 심하다. 머리가 아프다. 가슴이 저려온다. 어찌나 피곤했던지, 눈물 삼키며 가야할 이 시간,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식사드세요’라는 아가씨 말에 퍼뜩 잠이 깨어 허둥지둥 기내식을 먹었다. 2시경 드디어 평양 도착. 그러나 기내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매우 초라하다는 생각이다. 3시경 되서야 공항문을 나설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최고 관문인 평양공항치고는 너무 작다. 일이 돌아가는 시스템도 매우 답답해 보인다. 3시15분 경 우리를 마중 나온 그리스도교 연맹의 안내원들의 인도에 따라 15인승 승합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는데, 각종 선전 문구들이 늘어서 있다. 생각만큼은 섬뜻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데...
보통강변에 위치한 보통강호텔에 도착한 우리 8명의 방북 단원일행-협의회 회장인 나, 협의회 통일위원장인 장승익 목사님, 총무 강범식 집사님, 베를린한인교회의 이정복 장로님, 보쿰의 최광삼집사님, 라인마인 한인교회의 이한나 집사님, EKD의 오펜하임 목사님, EMS의 루츠 드레셔-은 17시에 장목사님과 내가 쓰는 방에 모여서, 함께 기도한 후 일정 및 기타사항들을 의논하였다. 두 번째 방문하는 루츠의 ‘거의 인민들을 직접 접촉하기 어려울 것이니, 최대한 노력해보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18시에는 호텔내에 있는 목란식당에서 조선그리스도교 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강영섭 목사가 대접하는 만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강 목사님은 진심어린 환영의 인사와 함께 식사를 위한 기도를 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는 바로 이어서, 기독교 재독 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초청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했다. 혹 눈물이 나고 온 몸이 저며 올까 염려했는데, 오히려 담담히 인사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으리라.
너무 반갑습니다. 우리 협의회와 독일 EKD를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감개무량합니다. 10여년 전 중국쪽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장백산) 등지에서 반쪽의 또 하나의 조국을 바라보며 눈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고 기도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을 만나뵙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또 하나의 조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대동강물, 조국의 흙을 담아가렵니다....
그리고 협의회 교회들이 정성들여 모은 15,000유로를 밀가루 대금으로 강영섭 위원장께 직접 전달하였다. 이어서 통일위원장 장승익 목사님이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 앞으로 랩톱과 기념품, 그리고 체온계 수백 개 등을,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전해 달라고 하는 조그만 선물 등을 전달하였다. 강 목사님은 처음에 조금 어색해하시다가 김국방위원장께 전해드리라는 선물을 대신 받아들면서는 ‘분명히 전해드리겠다’고 조금은 다른 자세로 응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전히 내 느낌이었지만......
흠잡을 데 없이 맛있는 저녁식사를 송화소주(약주)와 봉학 맥주에 겻 들여 배가 잔뜩 부르도록 먹었다. 식탁은 점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흘러가고...무슨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자칫 감정에 치우칠 것 같기도 하고 꾹꾹 눌러 참으며...독도 문제며, 가수 동생 현숙이 이야기며, 이한나 집사님의 아버지(이화선 목사님)에 얽힌 과거 이야기며... 등등. 적당한 분위기에 적당히 필요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20시10분경, 만찬을 폐하게 되고...
우리 일행들은 평양의 첫 날이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는 자세로, 우리를 안내하는 이 정로 국제부장에게 허락(통보)을 얻은 후, 보통강변 야간 산책을 나갔다. 강가에도, 큰 길 가로등에도 불이 없었다. 지나가는 전차 안에 사람들은 빼곡했고, 불빛은 희미했다. 분명 에너지가 부족함에 틀림없다. 온통 어두움의 도시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결코 그 어두움이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연인들을 비롯,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어둠 속을 걷거나 두런두런 앉아서 이야기하거나, 특히 여성동무들이 어둠 속에서도 편안하게 걷거나, 벤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며, 이 사회가 생각보다는 안정된 사회라는데 장승익 목사님과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니 21시가 훌쩍 넘었다. 그래도 우리 일행들이 헤어져 각자 잠자리로 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인 것 같았다. 나는 제안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커피 한잔 씩 하자고... 그렇게 우리는 둘러 앉아 커피, 깡통 맥주, 인삼차 등을 주문해 마셨다(1유로=173원 정도, 커피는 330원쯤).
인상에 남는 것은 접대원 장 금숙 동무와의 대화였다.
“예수 이름 들어봤습니까?” 그녀 왈 “제법 들어봤습니다.”
“믿어보지 않으시겠느냐? 여기 종교생활은 어떠냐?”
“종교자유 있어, 자신이 선택하죠.”
“주로 어떤 종교를 선택합니까?”
“주체사상입니다. 주체사상은 세계 속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녀에게 주체사상과 기독교정신은 비슷한 측면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강 범식 집사님이 기독교 정신을 소개해 주는 가운데, “기독교는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종교”라고 하면서,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이 때 장금숙 동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나요?” 강 집사님은 계속해서 “그렇다. 기독교정신은 왼뺨 맞으면 오른뺨마저도 돌려대라는 소위 가장 귀한 종교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난 왜 그렇게 낯이 뜨거워지는지. 우리가 아니 내가 얼마나 원수를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정말 그럴만한 믿음-힘(영적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얌전하면서도 지혜롭게 말을 받아주는 장금숙 접대원 동무를 통해,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는 커다란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삶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커피값은 EKD대표로 오신 오펜하임 목사님께서 계산해 주셨다. 그렇다. 이렇게 평양의 첫 날은 깊어간다. 함께 북조선, 우리 민족 전체에 대한 애정도 깊어간다. 비교적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그러나 애정의 눈으로 북조선을 바라보고 우리민족, 우리 조국의 미래를 고민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걱정은 걱정이다. 눈물이 어딘가로 새나가고 있으면 괜찮은데, 계속 쌓여 고이고 있으면 언젠가 터져 버릴텐데 말이다. 23시 30분, 자자 이제는 자야 한다. 내일 묘향산도 잘 다녀와야지?
“하나님, 이 감격, 기쁨, 뭐라 감사해야 할지요. 하나님은 들으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조국의 아픈 심음도 들으시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성큼 내딛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아멘”
2005년 5월 4(수)
새벽 3시경에 잠이 깨고 말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1시간 여를 뒤척이는데, 생각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지나간다. 북조선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하여 통합된 우리 함부르크 한인교회의 미래에 이르기까지....4시경부터는, 더 이상 누워 뒤척일 수만은 없다 생각되어, 가져간 작은 손전등을 켜고 헨리나웬의 책 “새벽의 영성”을 읽으며, 그야말로 새벽을 깨우고 있다. 5시인데, 잠깐이지만 또 눈을 붙여 보아야겠다. 잠이 와주면 좋을텐데...
잠이 들었긴 했나보다. 깨어 일어나니, 7시경이다. 7시 30분부터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계란국에 김치, 밥, 김...너무 너무 맛있다. 장목사님도 계속 맞장구... (밥은 100g, 150g, 200g 등, 자기 식사량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날 참 좋다. 우리는 8시25분쯤 보통강 호텔을 출발해 묘향산을 향해 간다. 물론 묘향산 관광이나 등반 목적이 아니다. 거기 묘향산 근처에 있는 국제 친선전람관이 우리의 중요 목적지이다.
15인승 마이크로 버스로 두어 시간 달려 평양에서 약 150km 떨어져 있는 평안북도 묘향산에 도착했다. 화장실(여기서는 ‘위생실’)에 들러 가느라고 묘향산 호텔에 들어섰다. 한쪽 코너에 기념품점이 있었고, 거기 강성금 판매원 동무가 일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녀를 잘 알게 된 이유는 물건파는 솜씨 때문이었다. 남쪽에 내려와서 장사하면 진짜 잘 할 아가씨였는데, 아쉬웠다. 그 동무와 조금 있다가 점심식사하로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되면 그 때 꼭 이 집에서 물건을 사겠다고 새끼를 걸어 게다가 엄지 도장까지 찍어 약속했다. 무수한 유혹을 물리치고 결국 점심식사 후에는 약속대로 그 아가씨가 일하는 가게에서 물건들을 팔아주었다. 많이 판다고 월급 많이 받는 것도 아닐텐데 얼마나 열심과 정성을 다해 장사를 해내는지...할 수 없이 그 동무와 사진 한 장을 같이 찍고 돌아왔다.
그 전에 들렀던 ‘국제 친선전람관’은 고 김일성 주석위원장(그 옆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선물 전람관이 자리 잡고 있다) 것이 해외 각종 인사들로부터 받은 수 많은 선물들을 모아놓은 4x4=16톤 육중한 무게의 문과, 창문 하나 없는 조선 대리석을 가지고 최고의 정성으로 단장한 건물이었다. 안내원 동무가 나더러 “단장님께서 열어보시지요.”라고 요청한다. 안 열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열수 있었다. 힘을 제법 들여서. 이 전람관은 모든 좋은 것을 자기 혼자 누릴 수 없고 인민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김주석의 생각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란다. 안내원 정순향 동무의 김주석과 김위원장에 대한 뜨거운 존경심-그 화려한 선물을 혼자서 다 받고 그것 전시하기 위해 엄청난 호화건물을 짓고 운영하며, 수 많은 인민들이 그것 보러 와야 하는데 대한 조그만 회의심 없이-을 보며, 다 이해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다 좋게 봐 준다 해도, 역시 그 생각 하나는 떨쳐 버릴 수 없다. 예수님의 얼굴, 형상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100 % 산 모습으로 점잖게 서서 나를 바라보는 밀납인형 김주석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서든 인정받고 싶고,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려고 하는)북조선 사회를 이해하게 되는 마음과 더불어, 가슴 한편에 뜨겁게 밀려오는 어떤 눈물의 파도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온통 조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전람관은 모든 소지품들을 보관소에 맡겨두고, 덧신을 신은 채 돌아보게 되어있다. 성서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여기는 거룩한 것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정말 거룩한 분 앞에서는 벗는 것이다. 그러나 김주석 앞에서는 덧신고, 덧 입는 정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벗어 던지셨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저러한 옷과 장식을 많이 입고 걸친다.
우리는 마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받은 선물전람관까지 돌아본 뒤에 정순향 안내원 동무와 아쉬운 작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쉬움을 고하는 안내원 동무 앞에서 내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준비해간 볼펜 하나라도 정분으로 주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아쉬움은 더 크다. 쇼핑코너에서 이러저러한 조선 물건들-송화가루, 적목저가락, 주걱, 촛대 등-약간의 기념품 및 선물을 샀다.
묘향산 호텔 2층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정말 맛있다. 그 중에서도 풋드릅의 그 상큼함이란... 게다가 ‘의례원(서비스) 동무’들의 아름다운 자태까지 더해지니 이런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1)설상가상 2)좌충우돌 3)갈수록 태산 4)점입가경 5)금상첨화
여유 있는 오찬 후 ‘원하시면 일찍 평양으로 돌아가서 좀 쉬셔도 좋습니다.’ 권하는 이정로 부장의 권면을 물리치고 우리는 묘향산 안 쪽으로 좀 더 들어가 보현사에 들렀다. 대웅전에서 두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어찌하든 모든 종교인들이 마음을 모아 조국통일에 기여하자고 하는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문화 유산에 대해, 단지 의무와 책임만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그리고 박학한 지식을 갖고 안내 설명해 준 안내원 동무가 너무 다정스럽고 고맙다. 팔만대장경 영인본 보관소까지 들러본 뒤에 나는 잠깐 숨을 고르자고 하면서 우리 단원들께 오미자 차 한잔씩을 돌렸다. “단장님께서 한 자 적어 주시지요.” 요청에 따라, 방명록 비슷한 곳에 몇 글자 적어 넣었다. 아마도 이런 비슷한 내용이었으리라.
“높은 산은 높다. 깊은 물은 깊다. 이것이 진리다.
높은 이상, 깊은 마음으로
불심과 신심이 하나 되어
조국통일의 한 길에 디딤돌로....”
이번에는 이별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준비해간 볼펜 하나, 애정담은 물건임을 강조하며 안내원 동무에게 전하고 헤어짐을 부러 재촉하는데, 안내원 동무의 말 “고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는 단장 동무의 애인이 될 수 없다는게 안타깝습니다.”(왜냐하면, 내가 보현사 내에서 애인 줘야지 하면서 선물을 하나 샀기 때문에 그걸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내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아 우리는 애인이 되어야 하는데, 될 수 있어야 하는데....
2시간여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부장님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쨌든 그가 얘기해 준 많은 것 중 기억에 담아 곰곰이 생각해 두어야 할 이야기는 1)김위원장이 했다는 말-남한 인사들이 방문해왔을 때, 뒷 벽면에 그려진 그림에 해를 가리키며, ‘이것이 뜨는 해입니까, 지는 해입니까?’ 즉 어떻게 보느냐 그 ‘보는 눈’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잊을 수 없는 이야기이며, 2)들판 혹은 산에서 뭔가를 줍거나 뜯고 있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분들은 뭐하는 거냐? 하는 루취의 질문에 “냉이 등의 봄나물을 캐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굶어죽을까 봐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취미 혹은 놀이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는 대답이다.
난 그가 결코 선전용으로 우리를 싹 무시하고 그저 로봇처럼 둘러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온 몸으로 느낀다. 그렇다면 이제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곧 친척을 만나게 될 것 같은(이전에 1992년엔가도 친척을 만나셨다던) 보쿰 교회 최광삼 집사님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는 고백적 주장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 기아, 아사 소식 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이해해야 하는가? 고민이 된다(일단 분명한 것은 이 부장님으로서는 자기 자리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18시 경 우리는 평양에 도착하고 조금 쉬었다가 호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정말 맛있다. 여전히 맛있다. 장목사님 표현대로 이 집 정말 잘한다. 한편 이 밥 한그릇 먹기 위해 인민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맛타령은 너무 사치인 것 같기도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하는가, 맛있는 것은 맛있는 것이지.
식사 중 루취의 제안으로 우리는 오늘 함께 하루를 보내며 보고 느낀 것들을 같이 나누기로 했다. 모임 장소는 루취 방으로 하기로 했다. 모여 앉은 우리는 각자 보고 느끼고 있는 것들을 상당히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다. 맥주, 커피 등등...거기다 이 한나 집사님이 사신 오가피주까지 겻들여 가며 우리들의 토론은 23시 30분 경 까지 계속 되었고 나와 장 목사님은 방으로 돌아와 못 다한 이야기들을 마저 나누었다. 하루 기록을 마치는 이 시간은 이미 날이 바뀌어 5일 01시10분경이다. 내일을 위해서 아니 오늘을 위해서 일찍 자야지.
“하나님, 해석학의 최고 공부 소재가 된 우리 조국으로 인해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쉽지 않은 답과, 훨씬 더 어려운 풀이 과정을 예상하며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주여 저희를, 우리조국을 도우소서. 아멘”
2005년 5월 5일(목)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벌써 8시 20분이다. 후다닥 눈꼽세수하고는 식당으로 내려가, 먼저 와 있는 일행들에 보조를 맞추느라고 황급히 아침식사를 했다. 곱돌창 찌개(일종의 두부 된장국)인데 역시 맛은 일품이었다. 급하게 먹어 제껴야하는 것이 아쉬움이었지만...
이 정로 부장께서, 부탁했던 이곳 성경과 찬송가를 가져다 주셨다.
9시가 넘어 ‘만경대 고향집’으로 향했다. 멋지고 아름답게 꾸며진 입구의 길들을 통과해 도착하는데, 수 많은 참관객들이 이곳을 오고 간다.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는 안내원 동무, 여전히 전혀 낯설지가 않다. 이름은 ‘한 성실’ 진짜 한 성실 하는 동무였다. 김 철주 사범대학을 나오고 1년여를 더 공부하여 이곳 안내원으로 봉사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아가씨였다. 김 주석 생가에는 하루에도 10만 명씩 방문한다고 한다. 중간에 소년단원 아이들 하고도 반갑게 만나 사진을 함께 찍었다.
숙소로 점심식사와 휴식을 위하여 돌아오는 길에, 만수대 창작 전시관에 들렀다. 특이한 것은 (물론 예술·창작품 전시관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안내원 동무였다. 여늬 안내원 동무와는 다르게 여유가 있고, 배짱이 있어 보였다. 복장도 그냥 평상복이었고... 잠깐이지만 난 줄창 그 안내원 동무 곁에 함께 다녔다. 뭔가 통하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그 동무는 산수화를 그리는 전문가였다. 그러나 공훈·인민 예술인 되기 힘들 것 같아 중도에 포기하고 이렇게 전시관에서 관리 안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 曰 “...될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난 놀기를 좋아해서...”
그녀의 자유, 낭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나올때 쯤, 딴 나라에서 와서 그림 흥정 터무니 없이하는 인간들 대하는 그의 대담·배짱있는 태도를 보면서, 더욱 확실하게 그녀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화가 리경옥)을 사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림이 없다고 한다. 결국 그냥 나왔는데 못내 아쉽다. 이 부장님께 이야기해 두었다. 내일·모래 중에라도 다시 들러서 그림 한 점 사고 싶다고. 그녀 그림은 아니지만 ‘칠보산 그림’을 사려한다.
점심식사(1시~2시경) ⇒ 장 목사님과 커피·면담
15시 25분경 다시 출발. 만경대 학생 소년 궁전으로
의무무상교육
1년-유치원. 4년-소학교, 6년 중학교
아이들 수업하는 것(무용, 바둑, 수영, 체조, 아코디언, 수예, 성악...기타 등등) 보면서, 왠지 자꾸 솟아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느라 내 눈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96년에 단동에서 압록강에 배를 타면서 겪었던 경험과 함께 겹치면서.
공연순서
·무용
명절맞이 부채춤
·고음저대 이중주
·남독창 ~“그 학생이 바로 저랍니다.”
·독무~“패랭이 춤”
·여중창~대 원수님 말씀하셔요
조용히 조용히
·불후의 고전적 명작 “조선아 너를 빛내리”
·남독창~“장군님은 선군 햇님이시지요”
아 아버지 장군님은 우리 행복 꽃피워주신 선군해님이시오
·여중창~“장군님 한 분밖에 우린 몰라요‘
....글한자 배워도 장군님 위해
·장고제주~우리 장단 좋아요
·민속놀이~줄넘기
·타악기를 위한 경음악~맥두의 말발굽소리
·녀독창~“우리 학급 동무들”
우리 학급 동무들 하나같이
·····모두 다 일등이야
우리 학급 동무들 하나같이 순박해
·····모두 다 제일이야
우리 학급 동무들 하나같이 씩씩해
·····제일이야 제일이야
·체조무용(mit 훌라후프)~“미래의 주인은 우리들이다”
···미래의 주인은 장군님 아들 딸 우리들이다
·합창(지금까지 나온 아이들 모두)~“지덕체로 받들자, 장군님”
아 아버지 김정일 장군님 지덕체로 받들자
< 공연을 보며...>
또 한편 가슴이 아팠던 날.
누가 남쪽 아이들보다 북쪽 아이들이 더 불쌍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누가 북쪽 아이들보다...말할 수 있겠는가?
더 많은 생각- 서로에 대한 이해-이 필요하다.
김일성·김정일만 빼면 system상으로는 너무 부럽지 않은가?
하긴 집단교육의 아픔은 분명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원수님 장군님 대신 우리주님 붙이면 딱 좋은 가사들이 계속된다.
나라·국가· 정부는 뭘 해야 하는가를 한편으로 잘 보여준다. 줄넘기 놀이를 확실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낸 모습. 부럽고 자랑스러운 측면이 많다. 그러나 그만큼 비례해서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 이 사회에서 종교가 얼마나 필요할까? 거의 완전한 자체 완결구조사회(zB. 독일)안에서 종교의 힘은 상대적으로 무력해지는 것 아닌가?
공연장 좌석에 앉으면서, LA에서 오신 동포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LA지역 평화통일자문위 관련된 분들이 47명인가 오셨다고 한다. '해동‘의 초청으로, 그 중에 성 현경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명함(수첩을 찢어)을 주고 받았다. 돌아오는 車(오늘부터 45인승 고급대형자로 바뀌었는데)안에서는 이 차를 기증해주신 (남한)대한민국 예장통합 남선교회 전국 연합회 대표단들(김용덕 장로님을 비롯하여...)을 만나 잠깐이지만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왔다.
김용덕장로:작년 남선교회 회장, 금호중앙교회 장로,이종윤 목사님 잘 알고, 물론 김태범 총회장님 잘 알아 안부전한다고 함.
오늘 저녁 식사는 특별히 우리 방북단원들이 (즉, 우리 기독교재독 한인교회 협의회가) 조선 그리스도교연맹의 수고와 정성스런 대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외식으로 대접하기로 했다. 애초에는 단고기(멍멍탕)로 메뉴를 정했었지만, 준비가 여의치 않아 토요일로 미루고, 고려호텔 식당으로 가서 불고기를 함께 나누었다. 이쪽 Tisch에서는 이부장과 오펜하임 EKD목사님, EMS의 루취, 라인마인교회의 이 한나 집사님이 주로 오는 10월의 기독교연맹 세 분의 방독件에 관해 실무적 협의를 하고, 나는 주로 듣고 있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둬시간여 그 문제가 일단락 됙, 물론 나는 협의회 회장으로서 일종의 섭섭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일대로 처리하기로 하고, 이부장께 솔직한 느낌을 담은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바로 낮에 들었던 생각이었다. 이 정도, 즉 주체 사상으로 올바른 사회, 한 인간의 나아갈 길이 다 제시되고 대체로 거기에 인민들이 공감하며 따라가고 있는 듯한데, 그렇다면, 과연 이 사회에 종교가, 하나님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부장님은 소위 하나님신안, 예수신앙과 주체사상이 어떤 식으로 연결(조합or종합)됩니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한 마디로, 주체사상은 그대로 수용하면서, 하나님 믿는 것이 그렇게 충돌을 일으키는 거의 아니다 하면서 좀 별개의 것으로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는 그의 말에 이런식으로 응답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쩌면 두 배로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소위 일반사회 속에서는 내 인생의 진정한 가치관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예수안세서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신앙을 갖게 되었다. 당신은 주체사상에도 만족하고, 하나님신앙에도 만족하니 참 부럽소”
이 부장은 매우 솔직한 사람 같았다. 북조선의 어려운 형편도 다 이야기하고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문제의 핵심은 ‘미국’의 간섭과 경제 등 제반분야의 통제에 있다고 말한다.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기왕에 전해 듣고, 책으로 읽던 내용을 현지에서 확인하는 셈이다. 그에게 우리가 돕는게 물건(esp.식량)으로가 좋으냐, 현금으로가 좋으냐 물었을 때에도 그는 솔직한 답변을 했다. “물론 일차적으로 물건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연맹이 이 물자들을 지원하고 배급하려해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씩 이렇게 지원해 주시는 것들은 대체로 이 평양주변에서 다 소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있어야 차에 물건을 실어서 시골로 보낼 수도 있고, 기타 여러 가지 봉사사업을 할 수 있지요. 돈도 매우 중요합니다. ”
그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특히 우리 통합교단의 예를 들며, 북에다 교회 많이 세우게 해달라고 하는데, 이곳 사정을 너무 고려하지 않은 자세라는 것이다. 루취는 함께 공감하며 우리 한국교회가 실상 너무 교만한 측면이 많다고 지적했고, 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1만 2000~2만 對 천 이백만 그리스도인
1:100
그러나 1이 꼭 100에게 진다고 말 할 수는 없는것.
하루 일과 모든 것이 이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11시경이 다 되었지만, 내가 따로 통일위원장과 총무를 만나자고 했고, 이 정복 장로님이 강집사님과 한 방 쓰시기에 그 방에 모여 의논을 했다. 루취가 와서 한 동안 함RP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 우리는 이어서 우리 협의회교회가 좀더 통일운동사업을 잘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라도 우리 ‘기독교 재독한인교회 협의회’라는 조직의 실재성과 그에 따른 중요성을 이들에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는 발전적 의견을 함께 공유했다.
장 목사님과 방으로 돌아오니 새벽 1시경, 하루 일과를 정리하며 이렇게 몇 자 적고나니 2시다.
이제 자야지. 함부르크로 전화를 해 볼까?
「하나님, 어린이들은 정말, 오늘 어린이 날이잖습니까? 우리나라의 보배요, 천국의 보배요, 천국의 씨앗임을 믿습니다. 남과 북, 북과 남, 모든 조선의 어린이들이 행복하게 해 주세요. 아멘」
5월 6일(금) 비
9시25분 경, 내 잠바를 잃어버렸다고 한바탕 쑈를 하고 판문점을 향해 출발했다. 비가 온다. 우리 마음을 아는 듯... 큰 길 ‘통일로’를 지나는데, 길 옆으로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문구가 들어온다. “우리의 아버지, 위대한 김일성 수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어제 가 본 ‘조국통일 3대 헌장탑’을 지난 우리는 남으로 남으로....
검문소 몇 개를 통과했나보다. 판문점에 거의 다 와 가는지. 한 검문소에서는 우리들의 사진촬영이 문제가 되어 20여분간이나 지체되었다. 결국 하전사가 우리 차에 올라서, 조금 전에 찍은 몇 개의 사진들을 지우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아침에는 잠바때문에, 낮에는 사진촬영 때문에, 이부장님과 김전도사님께 자꾸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죄송스럽다.
비무장지대 입구에 드디어 도착했다. 약간의 쇼핑을 하며 한 30분여 기다려 수속을 밟고난 후 다시 차를 타고 판문각으로 들어갔다. 아 판문각, 매번 남쪽 판문점 쪽에서 비춰주던 그 판문각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나. 그럼에도 이 광경을 놓칠새라 열심히 사진찍고 있는 나. 가슴 아프지 않은가? 난 너무 멀쩡한 거 아닌가? 안내하는 군관 동무가 방명록을 쓰라고 권해서 몇 줄 적었지만... 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이상하리만치 나는 무덤덤, 무감각인 채 하고 있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텐데...글세 얼이 다 빠졌는지, 아침부터 그 쑈를 하고 출발하더니 이번에는 거듭 모자를 흘리고 다닌다. 이부장님과 김혜숙 전도사님께서 몇 번이나 챙겨주셨는지 모른다. 그래 자위하자. 거기까지 가서 너무 제정신이면 곤란한 거겠지.
판문각에 오래 있지는 않았다. 오래 있으면 또 뭘하나? 우리 일행은 모두들 담담하게 ‘관람’하고 돌아나왔다. 각자의 가슴 속 사정을 일일이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또 표현한 들 무엇하리. 영화 “JSA 공동경비구역”을 생각하기에는 뭔지 모를 것이 가슴을 탁 막히게 한다. 머리 속도 새하얗게 된 것 같고...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그 곳을 빠져 나와 지극히 자연스런 발걸음으로 (물론 차를 타고) ‘개성’시내로 들어가 자남산 호텔 내에 있는 식당에서 또 쇼핑들도 하고 식사들도 잘한다.
점심식사 후, 우리 차는 다시 평양으로 부지런히 달려간다. 17시경 주조선 독일대사관에 도착하였다. 곧 이임한다고 하는 여자대사분과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대사의 입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흘러나왔다:schlim, unglaublisch, schwer, pessimistik...)를 나눈 후, 저녁식사를 위해 평양에서 최고급 호텔이라고 하는 ‘양각도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지하 중국 식당에 자리를 잡는데, 대사 외에도 이곳에 와서 머물고 계시는 독일분들(예:김일성 대학에서 독일어 가르치는 분, 기아대책기구에서 파견나와 수고하고 계신 분, 독일 FDP에서 나와 계신 분, 돌메쳐 등...)과 기타 외국분들 대여섯분도 함께 하는 만찬이었다. 마침 ‘돌메쳐’역할을 해주시겠다는 독일분도 계셨는데, 나는 고집스럽게 혼자 들어보겠다고 앉아 있었는데 결국 괜한 오만이었음을 느꼈다. 설사 독일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돌메쳐 형제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으면 더욱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1시 30분이 넘어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호텔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 둘러 앉아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 하루가 또 지나갔다. 얼핏 얼핏, 내가 마치 꿈 속을 헤매다니는 몽유병 환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반도, 우리조국,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더욱 강하게 느낀다. 그리고 그 강도의 무게만큼 미래에 대한 염려(혹은 걱정)으로 가슴은 더욱 짓눌려 온다. 이 한나 집사님이 중국 음식 드리소 속이 안 좋으신지... 이번 여행 초기부터 감기 때문에 고생하시더니 배탈까지 나셨다. 빨리 좋아지셔야 할텐데...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평화를 이루어주신 예수님,
어떻게든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 오늘도 탄식하시는 성령님!
우리 조국을 도우소서. 도우소서. 아멘.”
5월 7일(토)
스산하고 추적추적한 어제 날씨와는 다르다. 창밖으로 보이는 보통강 주변도 밝고 활기가 넘친다. 8시 30분 조금 넘어 우리는 서해갑문을 향해 출발했다. 9시 40분경 남포항에 도착.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남한의 인천과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해설원 최영옥 동무(16세처럼 보이는 24세)의 안내로 서해갑문 건설과정 소개 비디오를 시청했다. ‘그저...눈물겹다.’ 이곳 해설원 동무는 다른 곳의 안내원 동무나 해설원 동무들 하고는 또 달랐다. 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이야기해준 바대로, 그녀는 꼭 16세 소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24세의 확실한 처녀인, 매우 발랄하고 재치있는 동무였다. 서해갑문의 완공으로 얻어지는 효과를 ‘귀찮게 매번 찾아오는 한 남자친구’ 이야기-그녀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하면서 쏟아낸다-를 통해 얼마나 실감나게 전하는지 모른다. 눈이 큰 해설원, 우리 조국의 미래, 젊은이, 그저 그녀를 보며 아리한 가슴 쓸어내릴 뿐이다. 해설원 동무는 차 안에서 마이크를 붙잡고 노래까지 불러준다. 참다 참다 난 마이크 앞으로 나서고 말았다. 그녀의 ‘이별가’ 에 이어 나는 애정담은 ‘일곱송이 수선화’를 그녀에게 바쳤다. 소설이든 사실이든, 어쨌든 이 아가씨의 일생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이별, 이별 또 이별. 이별 연습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많이 해도 되는 것인가? 가슴에 깊은 멍들어 돌아가는 것 아닌가.... 주님! 괴롭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다각도로-물론 매일 그래왔지만- 가슴 아픈 날이다. 점심 먹고 난 후, 어쩌다 일행과 떨어지게 된 장목사님과 나는 15시 30분 까지 1시간 30분 정도 평양시내를 거닐 수 있었다. 물론 우리를 따라 다니며 감시하는 사람 없이 말이다. 똑 같은 상황에서 남쪽에서는 어땠을까? 생각했던 것 보다는 평양 시민들이 비교적 밝고 생기가 있었다. 그러나 한 동안을 걸어도 지리를 묻는 몇 마디 외에는 북조선 우리 동포들을 마주치며 지날 뿐이다. 몇 마디 말을 나누어도 우리 서로 이방인 같다. 아닌데, 그게 아닌데. 물론 평양시민들을 말하기보다는 어쩌면 나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걷다가 약속 시간에 쫓겨 숙소로 돌아오는 길, 열서너살 쯤 되어 보이는 두 청소년에게 몇 마디하며 선물로 주고 싶다고, 볼펜 등을 주려고 하는데, 그들은 ‘일 없습니다’ 하면서 분명하게 거절을 하고 학교로 쑥 들어가 버렸다. 이곳에서 상당히 부드러운 언어(남한 뜻으로는 ‘괜찮습니다’)인 ‘일 없습니다’ 였는데, 왠지 이 순간은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96년 압록강 신의주 앞에서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단동) 오늘 조금 더 다른 생각이 추가된 것이 있다면, ‘북조선 우리 아이들, 그래도 잘 크고 있구나’ 였다.
우리 버스를 타고 부흥역(지하철역)에 내려 한 정거장 시승을 했다. 말로 듣던대로 지하철역은 매 역마다 전등 및 인테리어, 기둥, 그림 등이 완전히 다른 특이하고도 화려한 역들이다. 기둥 및 바닥재는 온통 다 조선 대리석이다. 이용하는 ‘인민’들도 꽤 많았다. 지하철역에는 신문대가 군데군데 놓여 있어, 이 사람 저 사람 둘러서서 유심히 신문들을 보고 서있다. 나도 슬며시 근처에 가서 신문을 본다고 서 있는데, 그저 마음이라고는 덥석 그들을 껴안고 싶은 생각뿐이다. 또 다시 가슴이 저려온다.
간단히 지하철 순례를 마친 우리는 만경 교예 공연관에 가서 소위 서커스 및 요술을 보았다. 수 천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실내 공연장이다. 기예, 재치, 관중들의 만족도, 모두 최고였다.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운 만큼, 사랑이 큰 만큼 아픔도 크다. 또 가슴이 저려온다. 이번에는 두 배로 그렇다. 아슬아슬한 장면들을 그들이 수행할 때마다 가슴을 얼마나 졸이고 또 졸이게 되는지... 그렇게 해서 뜨거운 박수를 치다보면 다시 눈물을 막느라 멈칫멈칫. 공연 중 한 형제가 아슬아슬 잘 하다가 끝내 성공을 못하고 떨어졌다. 실수인 셈이다. 그러나 나도 ‘북조선 인민’들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가장 큰 박수가 그에게 쏟아졌다. 정말 ‘실수가 아름답다’는 것이 진리임을 느꼈다. 열심히 사는(한) 사람에게는 때로 실수도 아름다운 것이다. 뛰어난 공연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웃기는 대목에서 배꼽을 잡고 웃어대다가도 또 한편 멍들고 있는 가슴을 나는 쓸어 내려야 했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짠~
오늘 저녁식사는 예고된 바대로 단고기로 하기로 해, 우리는 ‘안산관’으로 갔다. 숙소 바로 근처의 유명한 단고기집이다. 여기서 우리를 접대한 박영란 접대원 동무는 또 얼마나 이쁘고 지혜로운지. 우리는 저녁식사동안 그녀와 연달아 주고 받는 말들을 통해서 온통 마음을 다 열어야 했고(입을 다물 수가 없었으니 속을 다 들여다보인 셈이다), 심지어 장목사님은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자세로 달아나려는 배꼽 간수하시느라고 애를 쓰셨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이정복장로님의 의도하지 않던 애드립이 큰 몫을 했다. 기세가 한껏 오른 우리 일행은 마지막 한잔씩(북한 송학소주)을 따라 건배했다.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접대원 동무의 행복을 위하여!! 이어 루취와 오펜하임이 노래를 하겠다고 하더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부르잖다. 갑자기 이장로님은 우리가 다 일어나야 한다고 벌떡, 결국 우리는 기립으로 <눈물젖은 두만강>이 아니라 한 서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했다. 아, 또 다시 이별, 이별. 그렇게 이 밤은 또 깊어가고...
우리 일행은 아쉬움이 남아 숙소 커피숍에 또 둘러 앉아 한잔씩하며 마무리...
돌아보면, 오펜하임 목사님이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북한에 처음 왔고, 그러기에 개고기도 생전 처음이란다. 독일인들 개고기 먹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데, 그는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또 옆에 앉은 루취는 모든 면에 얼마나 열려있고 융통성이 많은가? 한국도 잘 이해하고 있고. 그런데 그는 또 십수년전쯤부터 육식을 안 하기로 결심해서 다른 음식을 주문하고 상치, 오이 등을 먹고 있다. 모든 것이 보기에 좋다.
0시 30분이 다 되어 버렸다. 이제 자야지. 내일 주일을 위하여.
주님, 절대 이 한반도 땅에 다시금 피의 싸움이 없게 하소서.
오랜 이별의 아픔으로 찢기고 멍들고 멍들다 못해 썩어 문드러져 버린, 말라 비틀어진 뼈다귀같은 남북 동포들의 마음에 생기를 부으소서.
새 살이 돋게 하소서.
주여, 절대 전쟁없게 하소서.
주여, 주변 강국들의 힘마저도 특히 미국의 어처구니없는 힘마저도 주님의 손 안에서 녹여 주옵소서.
주여, 이 북조선의 살길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 온 한민족이 사는 길이오니... 주여...
5월 8일(주일)
오늘은 아침 식사를 생략했다. 그것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할테니. 우리 일행은 호텔 9층 가운데 복도에서 특송 연습을 하고, 봉수교회로 갔다. 봉수교회에 도착해서는 가까이 있는 평양신학교를 먼저 둘러보았다. 우리 교단에서 세웠다고 하는 비닐하우스도 보았다. 백동일전도사님(평양신학교 7기)이 이모저모 구경시켜 주시며 설명해 주셨다. 8기생 두 분도 함께 만났는데 이 분들은 마지막 논문을 쓰고 계신다고 하는데, 테마가 뭐냐고 물으니까 아직 말씀드리기에는 뭐하다며 답을 않는다. 신학교는 한번에 10여명을 입학시켜 5년을 공부하고 그들이 끝나면 다시 10여명을 입학시키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전 10시부터는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오늘은 5월 8일이라, 어머니주일로 드려졌다. 이곳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손효순 목사님이시다. 요한복음 19:24-27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주셨다. 모 집사님의 기도-많은 부분 선동적인 설교 비슷한 기도였는데, 이게 어머니주일이라 더욱 그랬던건지 알 수가 없다. 찬송과 헌금 후에 우리 일행이 특송 <‘주안에 있는 나에게~’ 여기 찬송가로는 294장>를 부르고, 인사하는 순서를 가졌다. 나는 가능한 담담하게 인사하려고 애를 썼다. 혹시라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복받쳐 올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원해서...아마도 인사 내용은 다음과 같았으리라.
[반갑습니다. 저희를 초대해주신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의 강위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봉수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손효순 목사님과 교우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고 함께 예배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는 기독교 재독 한인교회 협의회 대표단들입니다. 그리고 독일교회 EKD 대표 두분과 함께 왔습니다. 저는 협의회 회장이며, 독일 북부 지역의 항구도시인 함부르크 한인교회를 목회하고 있습니다. 함부르크 한인교회는 얼마 전 3월 말 부활주일에 15년간 갈라져 지냈던 두 교회(함부르크 한인교회와 함부르크 새한인교회)가 다시 작은 통일을 이루어 하나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시는 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는 저희 협의회 한인교회 안에서도 이미 일어났고, 이제 곧 우리 조국 한반도 땅에서도 일어나게 되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역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창세기 말씀에 보면, 두 형제 에서와 야곱이 오랜 동안 떨어져 살다가 야복나루 건너편에서 마침내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형님의 얼굴을 보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마음입니다. 여러분을 보니,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빨리 다시 또 만나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십시다. 사실상 조국의 통일을 위한 노력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십자가를 기쁘게 져야 할 것입니다.]
인사 후 준비해 간 두개의 왕초를 손목사님께 전달했다. 이어 오펜하임과 루취도 독일말과 조선말 통역을 하며 인사를 했다. 작은 선물-루터기념물-도 전달하고.
예배당 앞에서 기념 촬영 후, 급히 칠골교회로 향했다. 그 곳은 물론 예배를 마쳤지만, 교우들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다. 교회대표분들은 아마도 목사, 장로3(여2,남1), 권사1, 집사3 정도 되시는 것 같다. 칠골교회당에 차가 들어서는데, 교우대표들이 마당에 서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마중을 해 주신다. 이 곳 담임목사님은 현 이 정로 부장님의 선임자였던 황 민수 목사님이신데, 소박하니 좋아 보이신다. 교회당안으로 들어서니 교우들이 예배당에 앉아 기다리고 계신다. 성가대원들도 자리 잡고 있고. 우리는 맨 앞자리에 앉아 황목사님의 교회 소개를 받았다. 그리고 성가대와 개인 특송 등 두 곡의 찬양을 드리고는, 우리 일행들에게 특송 하라고 영광의 기회를 주셨다. 우리는 또 한 곡을 급히 골라 찬양을 드렸다. 아, 황목사님은 여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이부장님께 무슨 언질을 받으셨는지, 대뜸 협의회 회장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며 나를 놀래키셨다. 예정에도 전혀 없던 순서다. 난 <반도의 십자가 어깨에 지고>를 불렀다. 또 가슴을, 눈물을 억누르며. “터질 거에요. 내 가슴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찬송을 부르며 우리는 예배당을 빠져나온다. 통로 끝에 서 계신 교우들과 손을 잡아 정을 나누며...
따뜻한 배웅을 뒤로 하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옥류관’으로 갔다. 쟁반 냉면을 시켜 먹는데, 정말 그 맛이 기가 막히다. 난 두 그릇, 장목사님은 세 그릇, 그렇게 냉면으로 우리 일행들은 뜨거워진 가슴들을 식혀 내고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옥류관 앞에, 그리고 안에도 꽤 있다. 김전도사님 말로는 옥류관 앞에 인민들 거의가 옥류관에서 냉면 먹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숙소로 돌아와 조금 쉰 후에 우리는 주체사상탑으로 갔다. 여전히 이쁜 해설원이 우리를 맞는다. 주체탑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인민대학습당 건너편에 있다. 1982년(2년만에) 세워진 주체탑은 높이가 170m라고 한다. 밑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동서남북, 평양 시내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상당히 잘 짜여져 있다. 멀리서보니까 아파트들도 그럴싸해 보인다.
우리는 이어 모란봉공원으로 갔다. 서서히 20~30여분 걸어서, 을밀대까지 갔다. <모란봉아, 을밀대야~> 노래 연구 좀 해봐야지... 을밀대 서쪽 옆에는 김일성경기장이, 북쪽 가까이에는 초대소(영빈관 같은 곳)가 눈에 띄었다. 모란봉 공원 산책 중에는 가족들이 함께 둘러 앉아 고기를 구워먹고 소주 한잔씩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함께 하는데, 다들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배불리 저녁들을 드시고, 우리는 또 커피숍에 둘러 앉아 한잔씩하며 또 하루를 정리한다. 오늘은 내가 또 한번 쏘고... It's my pleasure!
잠깐, 북한 X세대들의 정체성에 관하여. 가짜, 진짜 논쟁(논쟁은 아니었고 자기 견해 나눔)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다 해롭진 않다.
주님, 북한 교회위에,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위에, 각 성도들 위에 함께 해 주소서. 주님, 우리 일행들 끝까지 건강하게 하소서. 최집사님 친척방문건도, 이장로님 중국비자건도 모두 모두 잘 해결되게 도와주소서. 아멘.
5월 9일(월) 북한에서의 마지막 날
(조)산원 방문. 여성들을 위한 종합병원인 셈이다. 여성들을 위한 그분의(여기 식 표현대로) 특별한 배려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첫 아이는 무조건 이곳에 와서 인생의 빛을 보아야 하게 되어있다. 평양시내에 이 밖에도 10군데가 더 있다고 했다. 루취는 나오면서 한마디 한다. “다른 산원들도 이 병원처럼 다 좋은 병원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교회 방문. 산원 해설원 동무의 열심을 뒤로하고 우리 일행은 급히 가정교회로 향했다. 김영길집사님이라 하는 분 가정에 한 10여분 정도가 모이셨다. 이 분들은 봉수교회나 칠골교회에 가시지는 않고, 그 전 습관처럼 계속 가정교회로 모이신다고 한다. 지리적 이유도 있고. 이 분들의 예배에 그냥 함께 참여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우리더러 예배를 드려달라고 부탁하신다. 목사님들이 와 주셨으니, 설교말씀 듣고 싶다고 하시며... 그래서 내가 급작스럽게 우리 일행과 가정교회 식구들이 함께하는 조금 더 큰 가정교회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부양(Haus Frau)'인 자매 한 분의 능숙한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몇 곡 찬송을 같이 부르고, 통일위원장이신 장승익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신 후, 나는 사도행전 3장 1~10절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였다. 앉은뱅이는 바로 나였다고. 날 일으켜 세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 조국 생각하며 읽게 될 때, 허리 잘린 우리 민족이 바로 앉은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눈여겨 볼 때‘ 역사가 일어났다고. 그들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 일어났다고... 뭐, 그런...
설교 후 이분들을 축복하는 기도까지. 이렇게 예배는 마쳐지고. 이분들과 사랑의 인사와 대담(질문, 대답)을 했다. 내 질문 “예수님과 수령님 중 누가 좋아요?” 마치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하는 질문 비슷한 질문을 하겠다고 한 나는 이렇게 질문을 던졌던 것. 모두들 조금 난처해하는 듯, 어색해 하는 듯, 그때 김영길집사님이 대답하시길, “아, 우리를 입혀주시고, 먹여주신 수령님을 우리가 잊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난 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으로, 웃으며 다시 답하기를, “양 벽면 모두가 수령님과 장군님의 사진으로 되어 있는데, 한 쪽 벽에는 십자가가 달려있게 되면 어떨까요?...” 이 후 가정교회 식구들 중에, 공훈미용사이신 자매 한분이 독창을 멋지게 해 주시고, 또 다른 두 자매가 중창을 해주셨다. 잠깐 질의응답 뒤에, 김영길집사님과 이한나집사님의 이중창이 진행되었는데,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파울목사님과 루취의 간단한 선물 증정 후에 우리는 이분들의 배려에 따라 루터가 만든 노래<내주는 강한 성이요>를 함께 부르고 일어서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우리 다시 만날때까지>울려 퍼지나?? 가정교회가 속한 아파트 내부에는 우리 옛날 박정희 때 보던 각종 선전물들과 비슷한 것들이 보였다. 아파트 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우리는 또 다시 ‘이별’
점심 식사를 위해 호텔로 들어서는데, 아~!! 우리 최집사님 외사촌과 그의 딸처럼 보이는 두 분과 극적 상봉을 하셨다. 정말 TV에서나 보던 눈물겨운 현장이었다. 우리는 마치 무슨 일간지신문 기자나 된 것처럼 기쁨으로 눈물 범벅인 최집사님과 친지분들을 사정없이 찍어댔다. 식사 후, 최집사님은 친지분들의 고향집으로, 그 동안 싸 모으셨던 큰 짐, 잔뜩 차에 싣고 해외동포원우회 동무의 안내에 따라 방문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하시고 10일 새벽 3시~4시 사이에 돌아오신단다.
오전에도 중국 비자 때문에 애를 잡수셨던 이장로님은 김혜숙전도사님과 따로 움직이셨다. 중국대사관 사람이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4시 30분 정각에 비자를 받으러 오라고 하셨단다. 나머지 우리 일행은 남은 모든 선물들을 차에 싣고 김정숙탁아소로 향했다.
3~4세 어린이들은 월요일 아침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여기서 지내다가 부모님 곁으로 가 토요일과 주일 두 밤 자고,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들게도 여전히, 아니 더욱 그렇기에, 수령님과 위원장님에 대해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끝까지 일관되게. 이 아이들이 춤도 노래도 악기연주도 얼마나 잘하는지. 연주 후 우루루 그러나 질서있게, 달려나와 인사하는 이 아이들. 그저 한동안 끌어안고, 맛있는 방망이 사탕 하나씩 손에 들려주면 좋았을텐데... 그저 아쉬움뿐이다. 물론 다 끝나고 나올 때 탁아소소장님과 선생님들께 준비해간 위버라숑과자 등 여러 과자들과 학용품 등을 전달하였다.
소장님의 먼 전송을 받으며 우리는 우리 7박 8일의 방북일정의 마지막 공식방문처인 ‘봉수빵공장’으로 향했다. 우리 협의회가 해마다 보내는 밀가루가 이 빵이 만들어지는 주원료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작년에도 우리가 60톤 보냈는데, 이 곳 하루 밀가루 수요분량이 1톤이라 하니 60일은 우리 협의회가 책임진 셈이다.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KCF)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이 빵공장에서는 교대 교대로 하루 40여명 정도가 일을 한단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열 두세 분 정도가 일을 하고 계셨다. 우리는 즉석에서 만들어진 빵 맛을 보며. 이 밀가루 지원사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메이는 목 가운데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이 곳 빵들이 필요한 곳으로 즉시, 효과적으로 전달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물자 동원 등을 위해 현금이 또한 매우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역사가 이곳에서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우기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지가 조금 더 분명해진 것 같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고려호텔 쇼핑에 잠시 들러서 각 교회에 기념선물로 드려서 온 협의회 교우들이 함께 성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북한산 포도주를 구입하였다. 목사님들 드릴 아주 작은 선물들도 준비하고... 호텔에 잠깐 들러, 휴식 후 마지막으로 강위원장님과 그리스도교 연맹 이부장님, 김전도사님을 우리가 초청하는 만찬을 ‘안산관’에서 가졌다. 자리 잡는 일에서부터 우리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강목사님의 모습, 그리고 진심으로 서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축복하는 자리였다. 협의회 방북단원들을 대표해서 내가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이어서 오펜하임목사님, 여기에 강목사님의 답사. 그리고는 내가 식기도를 드린 후에 우리는 두어 시간 동안 애정 어린 대화와 함께 만찬을 나누었다. 우리끼리 다시 까페에 둘러앉아 북에서의 마지막 밤은 깊어만 간다.
아린 가슴, 다 적절히 정리할 수 없는 머리.
어쨌든, 분명한 것은 결코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것.
남과 북, 북과 남의 평화의지가 통일의지가 더 확고해지며 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 협의회도 할 수 있는 일의 명분만이 아니라, 실제로 보았으니 작은 일이지만 계속 구체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가슴아프다.
강목사님께 인사로 드렸던 말, 괜한 형식이 아니다.
매번 이별 연습에 가슴이 아무래도 멍들어 가는 것 같다.
이 응어리, 이 멍 풀려야 할텐데.
주여,
우리 조국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여,
역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주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주여, 위대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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