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와 문화
한국 기독교와 문화
I.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라는 말의 정의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즉 ‘문화’가 달라짐에 따라 변해 왔다. 문화는 농경 사회에서부터 확립된 개념으로 처음에 ‘경작’의 의미에서 출발한다. 그러다가 수 많은 이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도시화로 바뀌고, 산업화로 심화되었다. 그러나 산업화는 문제가 많았다. 결국 문화의 개념은 인간화로 바뀌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1,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문화는 정보화 및 세계화로 탈바꿈하고 있다. 좁은 농토에서 시작된 문화가 도시를 거쳐 정보 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를 타고 세계 속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문화는 그 의미가 정적인 개념에서 동적인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문화는 과거에는 주로 정신문화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하는 모든 일을 ‘문화’란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문화는 그야말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가 먹되 어떻게 먹고, 잠을 자되 어떻게 자며, 여가를 보내되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이 문화의 문제이다. 문화는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문화를 벗어나 있지 않은 뿐만 아니라 문화를 벗어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문화를 만들고 소비하는 것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일상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며 누구나 책임지고 참여해야 할 일이다.
II. 왜 문화를 말하는가? - 어쩔 수 없는 ‘문화’의 시대
솔직히,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아직도 한국교회의 지배적 정서이다. 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나 시, 성화나 성극, 찬송가나 복음송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인들이 즐기고 누릴 수 있는 문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다행히 지난 수 년간 교회 안에서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수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문화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문화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고 있다. 한동안 문화에 대한 관심은 뉴에이지 운동에 제한되거나, ‘대중문화 속에 침투한 사탄’의 음모를 밝혀 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인이 문화에 대해 관심을 둔다는 것은 과연 그런 것인가?
현대 문화는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요약하면 세속화, 개인화, 다원화 등의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직면한 상황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문화다원주의, 그 가운데도 특히 다원주의와 개인주의가 조금 극단화된 형태로 나타난 감성적 개인주의가 점점 퍼지고 있다. 이러한 현대화의 결과는 최근 이른 바 ‘세계화’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 주변의 문화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세계화의 두 축은 ‘하나의 세계’와 ‘다양한 문화’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 신학도 시간과 공간 대응이 필요하게 되었다. 발빠른 대응이 없다면 살아남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기독교 안에서는 문화에 대한 찬반이 한창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말하든 이 사회는 문화 시대인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어떤 형태로든 교회는 여기에 반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III. 하나님의 문화 명령-기독교의 문화적 과제
문화의 문제가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에 무관심할 수 없다. 문화에 눈을 떠야 한다. 결국 문화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영성 (靈性)의 문제로서 일상적 삶을 어떻게 성화시켜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문화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문화 명령을 받고 태어났다.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지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문화 명령이 나온다. 그런데 이 명령은 요1:14절 말씀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사건 안에서 수렴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서에 나타난 문화 명령은 이 것 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세상을 교구로 삼고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주고 예수님이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문화명령을 내리신다(마태28:19-20). 그래서 오늘의 제자된 자들은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세상에서 기독교 문화를 형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는다(로마12:1-2). 특별히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세상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게 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가운데 기독교 문화를 형성해야 하는 과제를 받는다. 문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성서적 관점에서 문화를 본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창조의 회복(=일상성의 회복)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더 이상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다. 문화는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문화를 창조해 가야 한다.
IV. 기독교 문화는 있는가?
그러나 문제는 있다. 한국 기독교의 문화적 실체가 너무 애매하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과거는 어떠하였는가? 신앙생활의 영역은 주로 교회 생활로만 국한 되고, 삶의 한 복판에서의 다양한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무기력하여 왔다. 불행히도 한국교회는 한국문화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교회를 한국의 종교로서보다는 서양종교로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 더욱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민족주의적 정서와 문화를 강조하는 사회적 추세에 기독교는 더욱 주변화되고 있다. 이같은 전통문화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미래문화(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대중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국교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회도 많고 신자도 많지만 기독교 문화가 우리에게 체질화되어 있지 않다. 교회당 문화는 있어도 기독교 문화는 없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의 문화적 실체는 너무 애매하다. 이제 21세기는 세상에서 자주 들먹이는 문화의 시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기독교 문화-생명문화를 창조해 가야하는 그야말로 문화의 시대이다. 기독교는 몇 가지 점에서 반드시 문화적 반성과 대응을 해야만 할 것이다.
1. 시장 문화와 기독교
지금 우리 사회는 국제화, 세계화, 지구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고, 이 추세는 날로 심화될 것이다. 세계화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세계가 한 식구처럼 서로 어울려 사는 것처럼 바람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순수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국적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극단적 이윤추구성과 그것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세속적 문화 홍수들이다. 이 문화들은 세계 곳곳에 바이러스처럼 파고들어 그곳의 토착문화를 질식시키고 지배문화로 군림하게 된다.
기독교는 무엇보다 문화침입에 주목하고 이러한 퇴폐 문화에 굿굿하게 저항할 수 있는 대항문화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다만 문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교회는 시장 문화와 무관하게 발전한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 왔다. 한국교회의 물량,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것을 언제까지 무작정 덮어두고 피할 수만도 없다. 교회는 자본주의의 잘못된 양상에 대해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가 근면, 절제, 구제 등의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잃고 점차적으로 퇴색해 물량주의에 현혹되어 종말론적 기운을 잃고 세속화되어 간다면 결국 한국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게 될 것이다.
2. 포스트 모더니즘과 기독교
21세기의 문화는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과 세계 시장 경제체제 내에서의 소비문화의 어울림으로 특징지어진다. 서구인들의 자기 위기의식의 발현이자 반성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한국 사회의 문화 논의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한 면이 분명 있다. 그러나 세계 시장 경제 체제로서의 세계질서의 재개편, 즉 ‘세계화’(옳고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 라는 엄연한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서구 주도적인 문화 현상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은 첫째, 다양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고 둘째, 기존의 권위와 억압에 대한 저항성이며 셋째, 기존 가치와 권위에 대한 해체로 인해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허무주의 내지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고 이 전통을 강조한다(특히 ‘영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점이다.
서태지가 계속 성공하는 이유도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화현상에 나름대로 응답을 함으로써 대중들의 문화욕구를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적 욕구를 상품화하는 소비문화의 기본형식을 간파하고 앞선 광고술과 매니지먼트로 막대한 수입과 인기를 동시에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불의한 청지기만도 못했던 우리 한국교회의 과거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보다 열심히, 보다 지혜롭게 우리 삶의 장인 문화 현장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그러나 빛은 자기 몸을 태움으로써 그 빛을 발하고, 소금은 자기 몸을 녹여 낼 때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제 몫을 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때로 찢기고 상처나도 세상 속으로 가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점점 그 발붙일 땅을 잃게 될 것이다.
3. 전통 문화와 기독교
한국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한국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신분과 지위, 소속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피 이야기이며, 우리 삶의 뿌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자연스러움과 미래의 더욱 풍요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 기독교는 한국 문화의 정수와 만나거나 , 한국 문화의 육을 입고 한국민의 생명 경험 속에 깊이 성육화하지 못했다. 우리 것은 천박한 것이고, 미신적인 것이라는 편견이 오랫동안 지배해 왔다. 이제 새 시대에는 한국교회가 어설픈 훈육주임이 되려는 유혹을 극복하고, 한국문화의 적극적인 가치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V. 생명문화 창조를 위하여
우리는 앞에서 교회는 언제나 어떤 모양으로든 문화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교회는 그 문화를 누릴 뿐만 아니라, 문화를 구속할 책임, 즉 생명의 문화를 창조해 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문화의 차원에서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한 마디로 정리하면, 토착화(전통문화와의 관계)와 세속화 문제(대중문화와의 관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제 이 문제를 끌어 안고 다시 생명의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요, 다시 생명 사역에 전심전력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생명을 주신 예수를 주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문화 명령은 한 마디로 생명문화 창조요, 예수의 사역 또한 생명문화 창조였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세상의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시는 사건이었다.
예수의 뒤를 따라 한국교회가 생명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공존’의 방법을 더욱 열심히 체득해야 한다. 기독교 문화의 창달은 자기를 채움으로써보다는 자기를 비움으로써 더욱 손쉽게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여러 종교가 어울려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이런 조건을 감수하고, 아니 오히려 그 덕분에 지구촌 사회에서 지구인의 열린 규범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통일 한국의 시대를 상정하면서 열린 문화를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6.25전쟁의 뼈아픈 역사적 체험을 신학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분단과 분단 이데올로기의 고착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가? 오랜 분단으로 갈라지고 찢긴 우리 민족에게는 남쪽 문화와 북쪽 문화 간의 만남과 대화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지역과 인종과 계층을 초월해 ‘살림’의 문화를 만들어 가셨던 예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
셋째로, 기독교가 ‘민족의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만나는 일이 불가피하다. 전통문화를 일체 미신으로만 간주하는 태도로는 복음의 성육신을 기대할 수 없다. 먼저는 내용적으로 우리의 전통문화 속의 생명사상을 찾아 낼 수 있어야 하겠고, 형식에 있어서도 민족 고유의 좋은 양식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문화의 고유한 특성과 가치가 재평가되고, 재개발되어야 한다.
넷째로, 한국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의 전통적 종교문화를 변혁해야 한다. 기독교의 특유한 초월의 문화-현세 긍정적이면서도 현세에 묶이지 않는 진정한 초월의 문화를 이 역사 속에 심어야 한다. 문화와 교회의 관계는 인식론적인 관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교적인 관점과 윤리적인 관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다섯째로, 한국 기독교는 젊은 세대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현재에 이미 와 있고 미래에 더욱 중요시 될 문화에 대해 적절한 응답-수용과 비판적 대응-이 있어야 한다. 전통적 의례들을 대체할 대안적 의례의 계발이 필요하고, 젊은 세대의 종교적 영성을 일굴 수 있는 새로운 전례를 계발해야 한다.
결국 생명문화의 창조를 위한 최소한의 기본전제는 대화이다.
대화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생명의 대화(the dialogue of life)로서, 다른 문화를 향하여 이웃 사촌적인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함께 공존 상생하는 존재의 대화이다. 둘째는 행동의 대화(the dialogue of action)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긴급한 문제들인 평화와 생태학적 보존, 그리고 인구 폭발과 기아 문제 등을 중심한 연대적인 대화의 차원이다. 셋째로는 종교 경험의 대화(the dialogue of religious experience)로서 서로 다른 종교 간에 서로의 경험과 영적 가치들을 교류하고 나누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 대화의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여기서 생명문화의 창조가 시작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선포’도 가능하게 된다. 대화에 최선을 다하며 복음선포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복음 선포에 성실을 다하면서 대화를 선포와 별개로 여기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하나 한국 교회가 생명문화의 주체로 서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문화는 함께 소비되는 것이며, 또한 함께 창조되는 것이다. ‘따로 국밥’으로, 개인주의로, 개교회주의로는 생명문화 창조는커녕 허탄한 소비문화와 물량주의 문화에 빠져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공동체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서 생명문화는 시작되고 계속되어 갈 것이다.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