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일기 140314 렘22장 ‘정의, 용기, 앎’
말씀일기 140314 렘22장 ‘정의, 용기, 앎’
이상하게 오늘은 아침부터 내 지난 날을 돌아보며, 용기 없었음을 후회하게 된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일 수 있었던 때에 나는 두려움에 위축되어 무력한 선택을 하거나, 괜한 똥 폼을 잡으며, 관조적 태도를 취하곤 했다. '어떻게든 붙어 보리라, 꼭 그것이어야 한다' 하는 단호한 자세로 나가지 못했다.
용기의 부족일까, 목적의식의 결여일까? 그 근원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받고 싶지 않았던 소심함 내지는 자기 결백이 흐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왠지 용기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컸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산 동네 소위 달 동네에서 자라면서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싸우는 사람들을 자주 봐서일까? 용기는 내게 늘 부정적인 개념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왜 오늘의 말씀의 주제와는 전혀 연관되지 않는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걸까? 말씀을 읽은 뒤에 자연스런 묵상 중에 떠오른 생각들이니 잡념이 아닌 게 분명하다면, 그래서 무슨 관련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말씀이 내 무엇을 건드린 걸까?
오늘 말씀의 테마는 한 마디로 '정의' 아닌가? 이스라엘이 화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의의 실종 때문이다(3). 불의와 부정으로 자신들만을 위한 집을 짓는 자들(13-14)에게는 황폐와 멸망뿐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정의를 시행하면 즉 약한 자를 학대하거나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고(3) 자기 입에 쳐 넣을 생각만 하지 않고, 도리어 가난한 자를 변호하면(15-16) 형통케 되리라는 말씀이다.
황폐, 백향목, 자기를 위하여, 변호, 형통 등의 단어에 더 관심이 간다고 성경에 표시를 해 놓은 것을 보면 이 중에 날 건드린 말씀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통틀어 '정의'와 관련해서 그 무엇이? 그런 걸까? 정의를 시행하려면 사실상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 아니었을까? 힘 없는 용기는 객기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걸까? 그래도 힘 없어 보이고 싶진 않아서, 용기 없어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관조적 태도로 감춰 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정의를 실제 몸으로 행하는 일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글로 말로 혹은 소그룹 세미나의 대화와 학습으로 적당히 만족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을 위하여서도 더 용기내지 못하고, 사회정의를 위해서도 담대하게 부딪혀 보지 못하고, 그렇게 어줍잖은 내 지난 날이 아니었던가! 그게 마음 속 깊은 곳에 걸려 있다가, 내 개인적인 삶의 중요한 순간 순간에 힘껏 용기를 내 보지 못한 아쉬움으로 튀어 나왔는지 모른다.
오늘 나는, 무슨 결심을 하기 보다는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용기를 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공의와 정의를 시행하는 일에도 담대하지 못했던 나의 과거를 돌아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고 싶다. 진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계속 더 배워가더라도.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16). 이게 또 용기 없는 태도인가?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