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일기 130222 욥33장 ‘엘리후 때문에 골치가’
엘리후는 사실,
그에 관하여 양극단의 해석이 공존하는 논란의 인물이다.
이 사람을 어떻게 봐 줘야 할지
나도 헷갈린다. 골치 아프다.
헷갈리라는 게 저자의 의도인가? 까지도 생각해보지만,
그것도 명쾌하지는 않다.
욥도 엘리후에 대해서는 반응이 없고(물론 할 기회도 없었지만),
엘리후의 말에 바로 이어 하나님께서 등장하시고,
하나님도 그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언급을 안 하시니,
당연 책망이 있을 수 없고, 그러니 엘리후가 옳은 것 같고,
욥과 화해해야만 했던 세 친구들과는 다른 것 같은데,
그러나, 적어도 내게 드는 분명한 느낌은
그가 그렇게 아무런 비판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한 상담자요 위로자’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욥을 상담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면,
엘리후처럼 하는 게 최선의 자세라고 생각되진 않으니까.
그는 물론 인과응보를 넘어
‘시험을 통한 연단’(17-19)을 말함으로
논쟁에 조금 새로운 분위기를 가져오고 있지만, 결코
욥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있지 않으니까.
오히려, 욥에게는 엘리후의 그 의로운 양비론적 태도가
더 잔인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그는 더 고독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앉아서 법정 재판 형식의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은
세련되고 패기만만한 젊은 신학자가 여전히
고통 당하고 있는 이의 현실에는 별 관심 없는 것을 보며,
‘저 사람은 또 뭐라고 떠드나 보자’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따라,
어머니가 그립고 할머니가 그립다.
잔소리는 많아도, 논리는 조금 부족해도
늘 나를 염려해 주시고,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 주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