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일기 121115 대하 33장 ‘삼대’
삼대 부자 없고, 삼대 거지 없다는 말이 진실인 모양이다. 히스기야가 애써 회복한 여호와 신앙은 당대에서 그치고 말았다.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웠다(3). 그 이전에 악행을 저지른 다른 왕들보다도 더 심하게 우상을 섬겨,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다(7).
선한 것은 어렵게 전수되고, 악한 것은 너무도 쉽게 전달된다. 므낫세는 악행 중에도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보고 돌아오기도 하지만, 므낫세의 아들 아몬에게서는 그 아비처럼 최후의 겸손과 회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히스기야에게서 그 원인을 찾자면, 결국 히스기야는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에는 성공했지만, 제가(齊家)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하면 가정 교육에 실패했다는 것. 나는 좋은 아빠인가 생각하며 고개를 바짝 쳐들기는 어렵다.
또 다른 각도로 보면, 교육이나 전통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없는 ‘믿음의 자기 분량’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신앙은 그리 쉽게, 우리 기대처럼, 자동적으로 흘러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본인이 애써 세워 가야 하는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고 교육을 포기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믿음은 ‘각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라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다. 부모, 할아버지, 조상님들의 살아 생전의 기도 공덕으로 오늘 내가 든든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Ja이고 한편으로는 Nein이다.
조상 덕 본다고 자만할 것도 아니고, 못난 부모 만났다고 좌절할 것도 아니다. 물론 좋은 환경과 교육 조건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 극단적 현상이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 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관점으로 보면, 말은 달라진다. 다들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맞다 위기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이렇게 위기가 빨리 온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위기는 역으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낼 테니까.
어쩌면, 자식들, 교인들, 한국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도 사치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 위기가 있는데, 뿌리 깊은 죄와 욕망을 보는데, 누구를, 그 무엇을 탓하겠는가? “키리에 엘레이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