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일기 120921 대상20장 ‘키만 큰 사람, 키만 작은 사람’
“가드의 키 큰 자의 소생이라도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다 죽었더라”(8).
오래 전 여대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좋은 남자(일명 킹카) 평가 기준 유머가 있었다. 남자는 모름지기 4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키도 작은 남자, 키만 큰 남자, 키만 작은 남자, 키도 큰 남자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키가 큰 자”(4, 6, 8)들을 싸워 이겼다는 이야기니, 블레셋 사람들은 키만 큰 남자들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키만 작은 남자들인 셈이다.
껍데기가 중요한 세상, 성형 천국 대한민국. ‘당신의 아이를 몇 센티미터의 키로 키우세요’ 하는 광고가 버젓이 돌아다니는 세상. 이것도 다 ‘키도 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들 말하겠지만, 키도 큰 사람 되려다가 키만 큰 사람이 돼 버리는 것은 아닌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키도 크면 좋겠지만, 내 원대로 키를 줄이고 늘이고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키만 작은 사람’이 실제적인 우리의 최상의 목표일 것이다. 때때로 키 외에 나머지가 더 돋보일 수도 있으니 나쁘지 않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도 안다. 좀 더 키가 컸었다면 하는 아쉬움이나, 작은 손, 짧은 손가락으로 인한 콤플렉스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나였으니까. 웃으면서지만 지금도 가끔 거울 앞에서 까치발을 들어 올리며, “이만큼만 더 컸어도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중얼거리기도 하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리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다. 얼굴 하나쯤은 더 큰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때로 긴 욕조에 미끄러져 들어가기도 하고, 변기 앞에 까치발로 서서 일을 보아야만 하기도 하지만, ‘키만 큰 사람’일 수 있는 그들 속에서 오히려 편하게 잘 살고 있다.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잡다한 유행 신경 안 쓰며 내 멋대로 하고 다니며, 한 두벌 옷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그 가운데 나만의 자유, 내면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니까.
그래도, 다시 한번 겸허히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다윗이 떠올라서다. 대상20장 1절은 삼하11장1절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지만,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수치스런 내용은 슬그머니 빼버리고 간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현장에서 키만 큰 사람들과 용감히 싸워 자신들이 키만 작은 사람인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안일하게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1, 삼하11:1)던 다윗 왕은 육신의 정욕에 눈이 멀며 그야말로 ‘키만 큰 사람’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키만 작은 내가 되기를, 작아도 속이 꽉 들어찬 가정, 우리 교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