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일기

말씀일기 120807 왕하10장 ‘나의 열심’

유럽의 바람 2012. 8. 8. 06:09

 

 

여호와를 위한 예후의 열심(16)에도 불구하고 난 왜 예후가 하나도 부럽지 않은 걸까? 예후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잘 행하여 아합과 관련된 즉 바알 숭배자들을 다 척결(30)했는데도 왠지 떨떠름한 건 무엇 때문일까?

 

그가 바알 숭배자들을 다 제거했음에도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기(28-29) 때문에? 물론 그것이 예후의 한계다. 하지만, 이 대목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껍데기만 보는 것이다. 사실, 북이스라엘 왕으로서 여로보암이 단과 베델에 쌓아 놓은 제단을 제거하기는 기본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성경에서 조금 더 예후의 실상에 근접하는 표현은 그가 “전심으로”(31)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다는 거 아닐까? 그것을 내 식으로 표현하면, 예후의 문제는 바로 진정성의 결여에 있다고 본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그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에게서 진정성을 찾기가 힘들다. 예후의 행동양식은 그가 맡은 그 일의 거룩함과 정당성에 비해, 너무나 정략적이고, 폭력적이고, 교활하다. 마치 당쟁과 정권 찬탈, 그리고 피의 복수 등으로 점철된 조선시대 사극을 보는 것 같다.

 

성경을 읽으며 엄청난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는다 해도, 금방 느낄 수 있다. 예후가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 등의 현실 때문에 가슴 아파한 모습을 찾기가 힘들고, 그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기도한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16)고 어깨에 힘을 주는 예후의 모습이 내 눈에는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

 

누가 당신, 그렇게 소심해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겠냐고 나를 질책한다 해도 할 수 없다. 큰 일을 위해서는 때로 큰 희생이 필요한 거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큰 마음이 필요하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작은 자의 마음이 가장 큰 마음일 테고, 큰 일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면 나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지, 남의 피를 흘리는 것이 우선은 아닐 테니까.

 

매우 낭만적이라는 지적도 달게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님을, 한 개인은 도덕적이라 해도 사회는 매우 부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 낭만의 그 힘이 마지막 남는 순간까지 그 낭만으로 살고 싶다. ‘나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낭만으로,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며